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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

민중신학자료-평화와 에큐메니컬 통일 운동

by noobim 2020. 8. 23.

민중신학 세미나 발제

 

평화와 에큐메니컬 통일 운동

- 평화의 개념과 최근 통일운동을 통해 비추어 본 한국교회의 역할-

 

 Ⅰ. 서론 - 문제 제기 : 분단의 의미

 

  한반도에서 단일 민족의 역사를 오랫동안 지속해 온 우리 민족이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의해 분단된 지 어느덧 반세기 하고도 9년이 지났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과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원치 않는 굴곡의 역사를 거친 우리 민족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전개하리라는 부푼 희망 속에 8.15 해방을 맞이했지만, 실상은 민족 분단이라는 새로운 질곡으로 빠지고 말았다. 식민지 피지배 기간에도 끊임없이 민족해방 투쟁을 전개하였던 우리 민족이지만 독자적인 힘보다는 외세의 힘으로 해방에 이르렀다는 자기 한계로 인해서 우리 민족은 국토와 민족이 반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러한 분단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 심어놓은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어렵게 했고, 남북에 각각 세워진 양쪽의 분단국가들로 하여금 무력 통일도 불사하도록 함으로써, 6·25 민족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게 했다. 또한 남북 분단국가의 정부들은 정통성 경쟁의 미명 아래 자신들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기회로서 분단을 이용하기도 했다.

 

  한편 남과 북의 정권들은 통일의 가치를 앞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서로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 있어 왔고, 통일 담론을 독점함으로써 민간 차원에서의 다양한 통일 논의를 억압해왔다. 그들은 명시적으로는 민족을 회복하고 남북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면서 통일을 말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소수 비민주적 권력 주체의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써 통일의 과제를 변질시켜왔다. 또한 그들은 민족의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계급의 문제를 은폐하기도 했고, 계급적인 문제 제기가 있을 때에는 분단 상황의 적대적인 위협을 운운하며 민중과 민중운동을 탄압하였다. 남과 북의 분단은 처음부터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남북 권력 주체의 이해관계에 의해 유지, 강화,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남북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분단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시키는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살아왔다. 국민의 정권 같은 경우 햇볕정책이니 포용정책이니 하며 남북관계를 어느 때보다 호전시켜서 2000년 6월 13일에는 남북정상의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 괄목할만한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는데, 그러나 그동안의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는 점에서 분단 극복과 통일에로의 길은 아직은 힘겨운 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더욱이 1997년 12월 이래로 이남에 불어 닥친 IMF 시대의 도래는 우리를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에로 급속하게 편입시키고 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려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지구화는 다국적 기업들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강대국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구화로 인해 무한 경쟁의 정신이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고, 자본은 더 이상 자신의 조국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전세계적으로 확장되는 지구화로 인한 이득은 극소수에게 제한되고 있다. 평생 고용의 개념은 사라지고 불안정은 가중되고 있으며, 실업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시장민주주의를 강요하는 한편 복지민주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요인을 해체하고 있고, 전 세계적인 차원의 빈부 격차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신자유주의의 강제적인 시장경제체제로 인해서 분단이라는 민족적인 모순과 기득권자들의 자기 수호라는 계급적인 모순을 아예 방기할 위험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의 지구화에 직면해서도 분단을 생존의 문제이자 신앙의 문제로 이해하고, 분단극복과 통일의 모색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서적 통일의 근거와 민중 신학적 통일의 관점에 비추어 무엇이 교회의 과오인지를 확인하고, 그 과오로부터 철저히 돌이키는 것으로 출발점을 잡아야 할 것이다.

 

Ⅱ. 본론

 

1. 이론적 근거

 

1) 성서적 통일의 근거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미가서 4장에 나타나는 ‘주님이 주시는 온 우주적 평화’야말로 한반도의 참된 평화와 통일의 근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군사적 무기가 생겨났다는 것은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계급이 분리되어 졌음을 이야기 하며 이것을 다시 말하면 기득권자와 그 기득권 아래서 지배받는 이들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씀 가운데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다름이 아닌 주께서 판결하시고 틀어진 관계를 다시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어느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통치아래 누리는 ‘전 우주적인 평화’이다. 또한 이와 같은 평화는 분단된 한반도 내에서 ‘평화 통일’이라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한반도 땅에서 그 평화를 어떻게 이루느냐이다. 하늘의 평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는 것과 원래의 모습대로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새로운 국가를 이루는데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2) 민중신학의 통일 이해

 

  ⑴ 죽재 서남동 선생의 통일 이해

 

서남동 선생의 신학에서 민중은 한을 통하여 역사를 인식하고 한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고 한을 통하여 그 역사를 비론 미완이라 할지라도 향유하면서 민중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은 한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가치를 이루어 가는 역사창조의 힘을 역사 안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서남동의 이해는 우리의 역사적인 과제인 통일을 “화해”와 “공존”의 과정으로 보고 “한풀이”에서 화해의 역사와 공존의 미래를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본류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다.

서남동 선생의 말에 의하면 통일은 모든 역사적 한을 풀어내어 새로운 민족의 질서와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서남동은 통일을 과거 분단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창조라고 할 때 “화해”라는 말은 단순히 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역사적 과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일련의 창조의 과정이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창조“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통일은 역사의 서로 다른 단절과 계승을 통하여 변증법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듯 서남동 선생은 실제로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민중의 현실 속에서 즉 민중이 메시아 왕국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서남동 선생은 역사의 ‘아래로부터의 이야기’에서 통일은 민중의 꿈과 이상을 형상화하고 이것이 곧 민중의 메시아 왕국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통일신학의 중심은 민중이며 통일의 의미는 새로운 메시아 왕국의 꿈을 현실화하여 역사의 부활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⑵ 늦봄 문익환 선생의 민족주의와 통일 신학

 

  ① 민족주의

 

  문익환 목사는 민족주의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민족주의가 편협한 것은 아니다. 그의 민족주의는 구약성서학자로서 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아 민중적이다. 문익환 목사의 민족주의는 모든 세계가 잘살아야 하지만 가진 자들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제 3세계의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것을 통해서라고 한데서 잘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책인 『히브리 민중사』를 통해 뒷받침하는데 여기서 그는 히브리 민중과 한국의 민중을 동일시했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의 민족주의 대한 생각이 저변에 깔린 통일운동은 ‘환상적 통일론’이니 ‘몽상적 통일론’이라는 얘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히브리 민중과 같이 한국의 민중들도 위기에 빠져있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1910년의 상황이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또한 그의 민족주의 시작을 그의 출생에서 보기도 한다. 그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넓은 대륙을 보고 태어났다. 때문에 그의 정서적 조국은 고구려였으며,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었다. 이는 그의 ‘방북재판 상고이유서’에 잘 나타난다.

 

“제가 태어난 것은 두만강 저쪽 북간도입니다. 고구려와 발해의 넋이 가는 곳곳마다 스며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옛 강토를 못난 조상들 때문에 잃어버리고 중국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으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분을 삼키면서 자랐습니다. 우리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끌어내린 김부식을 원망하면서 살았습니다. 국경을 또다시 휴전선으로 끌어내리고 이것을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국토수호에 열을 올리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② 평화신학(통일신학)

 

  문익환 목사의 대표적 사상이라면 흔히 통일 신학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미루어 볼 때 그의 통일 신학은 뿌리가 평화신학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의 서론이 화해라면 결론은 평화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신학의 주체가 되어야하고, 통일 신학의 서론도 결론도 평화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즉, 문익환 목사에게 있어 평화가 모든 신학의 주제가 되어야 하지만 통일은 한반도라는 지역적, 사회적 상황에서 나오는 특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익환의 평화신학은 그의 일생에 걸쳐 포괄적으로 드러났으며 또한 그의 통일신학은 평등한 관계를 만들려는 것 가지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유와 해방이 없는 평등, 평등이 없는 자유와 해방 이 둘은 따로 따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즉 통일운동도 자유와 평등의 배타적 관계를 보완해 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주화운동 속에서도 그는 시종일관 민주화와 민족통일은 하나이지 둘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1995년을 통일 희년을 삼고자했다. 희년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말로 일곱 안식년이 지난 다음해로서 빚으로 밭이 넘어가도 무상으로 돌려받고 종으로 팔려갔던 사람도 무상으로 풀려나 자유인이 되는, 말 그대로 ‘민중해방이 선포되는 해’였다. 문익환은 ‘1995년을 통일의 원년으로’라는 구호를 공식화시켜 그의 통일운동을 채찍질해 나갔던 것이다.

 

2. 통일 관점의 종합적 견해

 

  우리는 이제까지 통일에 관한 이론적 이해들을 살펴보았다. 이 이론들이 통일에 대해 주장을 하는 것을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평화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도 주님이 주시는 온 우주적 평화로서 창과 칼로 갈등하지 않는 나라를 주신다고 하였고 서남동 선생이 이야기 하는 민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메시아 왕국의 도래에도 그 창조 질서를 유지하려는 평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의 평화는 그의 신학의 모토가 되어 버린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평화통일로만 기득권자들의 모순에서 압제 당하는 자들이 진정한 해방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론의 틀 안에만 가둬 놓지 말고 우리는 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실현하기 당국과 교회는 무슨 일을 해왔는가? 를 에큐메니칼적인 관점에서 알아보고 그 후에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3. 최근 통일운동의 노력들 - 2000년 이후 통일운동을 중점으로

 

  1) 2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민간교류의 변화

 

  최근에 통일 문제와 관련 되어 크게 논의되고 있는 것은 바로 200년 ‘6·15공동선언’이다. 이것은 통일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이를 중심으로 민간통일운동의 폭은 종전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어졌으며 통일 단체들 사이의 연대와 협력도 강화되었다. 민간통일운동은 ‘6·15공동선언’이전까지만 해도 개별적으로 활동하면서 통일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6·15공동선언’으로 통일운동에 범국민적인 참여가 가능해짐에 따라 각계를 망라하여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라는 폭넓은 조직을 구성하게 되었다.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종교단체와 민간통일운동을 주도해온 통일연대, 그리고 시민사회와 정당, 보수진영까지 포함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그것이다.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북 민간교류는 2000년 10월 9일부터 14일까지 남측의 10여개 사회단체 대표 및 인사 42명이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에 참관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노동당 행사에 남측에서 42명이 참관한 것 자체가 6.15공동선언 이후 달라진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2001년 통일운동은 남북 공동행사가 처음으로 열리고, 각각의 틀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민간통일운동 분야에서는 그 시초가 되는 해이다. 부문 공동행사의 출발은 남북 노동자 교류에서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은 정상회담 이전인 1999년, 이미 평양에서 남북 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개최하면서 새로운 통일의 환경을 한발 앞서 만들어 가고 있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 발표, 10월 조선노동당 55돌 기념행사 참관 이후에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부문 공동행사의 첫 발을 땠다. 2000년 12월, 금강산에서 남북의 노동자들은 ‘6.15공동선언지지, 관철을 위한 남북 노동자 통일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나라의 통일을 위해 ‘노동자가 앞장서자’는 결심을 함께 나누었고, 2001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대규모 공동행사의 문을 열어 놓았다.

 

  2001년 3월 10일, 남측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북측의 조선직업총동맹은 금강산에서 실무회담을 개최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노동자회의’를 결성하기로 합의하는 한편, 5.1절을 기념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의 기치아래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를 열기로 합의하였다. 5.1절 통일대회는 북측의 조선직업총동맹회원 700여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는 축하공연과 체육오락 경기, 남북노동자 합동예술공연, 폐막식 등 다채로운 행사들을 통해 동포의 정을 나누었다.

 

  2000년 10월 북미공동교뮤니케 발표로 북미 간에는 근본적인 관계개선이 모색되었다. 사상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문을 약속하는 등 변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진전되던 북미관계는 부시 행정부 등장으로 인해 악화의 기로에 접어들게 되었고, 순향하던 남북관계도 다소 주춤 하였다. 2001년 3월로 예정된 장관급회담이 연기되고, 4월로 예정된 남북적십자회담마저 연기되는 등 남북 당국관계도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물꼬를 연 민간급 공동행사는 남북관계를 연결하고 아래로부터 화해와 단합의 기운을 북돋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001년 6월 15일, 금강산호텔 앞마당에서는 ‘6.15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가 열렸다.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는 7대 종단,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통일연대로 구성된 ‘6.15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와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을 위한 북측준비위원회가 주최하였다. 이 토론회는 6.15공동선언 발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열린 민족공동행사로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과 북, 해외의 각계 사회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성사된 합법적 공동행사였다.

 

  2001년 평양에서의 8.15통일대축전에서는 행사장소가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이라는 점 때문에 남한 정부가 참가 불허방침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에서 강정구 교수가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라고 기록한 것이 남한의 보수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비판여론이 일었고 급기야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김포공항에서 21명이 연행되고 7명이 구속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이러한 여파로 이듬해인 2002년 새해맞이 공동행사가 무산되게 되었다.

 

  하지만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2002년 6.15민족통일 대축전이 금강산에서 열리게 되면서 남북민간교류는 다시금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간교류는 각계각층으로 세분화되면서 확대되어갔다. 천주교는 사상 처음으로 남북의 성직자, 수도자, 신자가 함께 미사를 드렸고, 개신교도 공동예배를 드렸고 불교는 민족문화유산의 공동관리라는 차원에서 북측에 있는 60여 개의 사찰에 단청원료를 지원하기로 합의하였다. 작가들은 문학작품 낭송회와 작가교류를, 예술인들과 언론인들도 교류와 접촉을 확대해 가기로 약속했다. 여성, 청년학생, 노동자, 농민, 어민들도 교류와 협력의 필요성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이 발발하여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듯 했지만 7월 25일에 이르러 북측의 서해교전에 대한 유감의 표명과 장관급회담을 제의해 오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2002년 8.15민족통일대회가 최초로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고 같은 해 부산아시안게임에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이 대규모로 참가하게 되면서 남한사회에 통일의 분위기를 확신시켰다. 10월 3일에는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의 민족단체, 민족종교단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개천절 공동행사를 개최하였고 10월 12일에는 남북, 해외 청년학생들이 모여서‘6.15공동선언 관철과 민족의 미래를 위한 남북해외 청년학생통일대회’가 10월 17일에는 남과 북, 해외 여성들의 ‘6.15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남북여성통일대회’가 열렸다.

 

  이후 2003년에도 3.1절 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였고 서울과 평양, 금강산, 인천 등지에서 계속적인 민간교류가 지속되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민간교류는 해가 갈수록 그 규모와 내용은 조금씩 발전되어 갔다.

 

  2)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한 교회의 교류

 

  ‘6.15공동선언’ 이전에도 남북교회는 지속적인 만남을 계속한 바 있다. 하지만 극히 적은 수의 대표들만의 조우였고 평양이나 제3국에서의 만남이었다는데 그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6.15이후 남북교회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내오면서 대대적인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북의 교회는 부활절 공동예배문과 8.15에 즈음한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 공동기도문을 발표하면서 남북 기독교인들이 평화통일에 기여하도록 꾸준히 노력해 왔다.

 

  2000년 ‘6.15공동선언’ 그 해 12월 15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동완목사와 조선그리스도연맹 위원장 강영섭 목사가 일본 뱃부 수지노이 호텔에서 만나 ‘6.15공동선언’을 적극 지지하며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1년 6월 18일에는 스위스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 본부에 남북의 기독교 대표단이 방문하게 된다.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인 콘라드 라이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동호나 총무와 조선 그리스도연맹 강영섭 위원장을 만나 ‘6.15공동선언’을 지지하며 이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펼칠 것을 논의하였다.

 

  이후 남북교회의 교류는 5.15이후 계속되는 민간교류의 장으로 합류하게 된다. 2002년 서울 워커힐에서 열린 8.15민족통일대회에서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최초로 서울에서 상봉하게 되었고 부분별 모임을 진행하였고 2003년 서울 워커힐에서 진행된 3.1민족대회에서는 각 종교별 합동예배를 진행하였다. 3월2일 주일, 북측의 조선그리스도연맹 회원들은 소망교회에서 남측의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북측교인이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들을 토대로하여 2005년 6.15통일대축전을 앞둔 5월 24일, 남북기독교인들의 독자적인 상봉행사로는 처음으로 ‘6.15공동선언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교회 금강산 공동기도회’가 개최되었다. 남측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측의 조선그리스도연맹이 공동주최한 기도회에는 남측 대표단 200명, 북측 조선그리스도연맹 중앙위원회 강엽성 위원장 등 12명이 참가했고 기도회, 성가제 등이 진행되었다. 남북의 기독교인들은 공동기도문을 통해서 “6.15공동선언이야말로 평화와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의 지표이며,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임을 기도하였고,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6.15공동선언의 실현, 반전평화 실현, 일본군국주의 부활 우려, 민족자주를 토대로 공조 모색’등을 함께 다짐하였다. 뒤이어진 성가대에서는 남측 동광교회 성가대와 감리교 청년회 중창단, 구세군이 참여하였고 북측에서도 봉수교회 성가대 7명이 참가하여 남북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같은 해 8.15행사를 마친 이후 남측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지원하는 평양 봉수교회 신축사업을 위한 감사예배가 평양에서 열리는 등 남북교회의 교류는 실질적인 만남과 생산적인 미래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남북교회는 2991년부터 현재까지 부활절에는 부활절 공동기도문, 광복절에는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 공동기도문을 공동으로 작성하여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의 모든 교회에서 같은 기도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3)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부터 현재까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만나 역사상 두 번째 정상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 기간 중 역사적인 상봉과 회담들이 있었다. 상복과 회담에서는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발전과 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하는데 따른 제반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협의하였다. 10월 4일 두 정상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한다.

 

  ‘10.4남북공동선언’은 ‘6.15공동선언’의 연장선상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남북관계의 발전전망을 마련하였다. 전쟁당사자간의 회담을 통해 정전협정을 종전 선에 있어서는 개성공단을 비롯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마련하여 평화와 번영을 동시에 추구하는 획기적인 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남북 간의 철로와 항로를 연결하여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져갈 것을 합의하였다.

 

  8개항의 합의 내용을 담은 ‘남북공동선언’은 ‘남북관계발전과 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하는데 따른 제반 문제들’이 폭넓고도 구체적으로 포함돼 향후 남북관계를 끌어올릴 ‘제2의 6.15공동선언’으로 자리 매김 될 것으로 보였다. 정부는 해설 자료를 통해 “‘2007 남북정상선언’은 ‘6.15공동선언’ 이후 7년간의 남북관계 성과를 토대로 그간의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한 차원 높은 미래 비전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2007 남북정상선언‘은 남북 간의 휴전협정과 60년이 넘는 분단 상황에서 오는 전쟁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 등 한반도의 모든 위험요소의 원인인 분단문제의 해결점을 이념이나 정치에서 찾은 것이 아닌 경제에서 그 해답을 내었다는 점이 특이할만하다. 또한 북한의 토지와 노동력, 남한의 기술과 자본이 한반도 재도약의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간의 이념과 체재의 대립으로 잃었던 상호 신뢰도 회복하고 서로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주고받는 상생의 통일방안을 6.15 공동선언에 이어 7년 만에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2007년 대선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면서 국민의 정부시절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 까지 햇볕정책으로 일관화 되어온 통일정책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10년간의 일관된 대북정책으로 만들어온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선언, 그 밖의 통일로 가는 제반의 모든 정책들이 외면당하게 되었다. 상징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부의 조폐논란이 있었고 결국 존속시키기로 합의하였지만 통일부장관 내정자는 반공의식이 투철한 대표적 보수논객이었다. 그리고 현재 청화대 홈페이지에는 ‘6.15공동선언’이나 ‘10.4공동선언’의 내용은 모두 삭제되었고 통일부 홈페이지에도 그 내용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 정도다

 

  2007년 10월 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2차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본 합의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평하였다. 그간 통일운동을 진행했던 에큐메니칼 진영은 구체적인 남북협력의 시대를 기대하였지만 북한과의 관계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현 정부의 성향으로 인한 남북관계의 경색을 걱정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실제로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국회청문회에서 함참의장의 선제공격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이 발단이 되어 급기야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남한 직원들이 쫓겨나는 상황까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원인은 현 정부의 대북관에 있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의 보수화는 대통령 취임 전후로 급속도로 진행되었는데 특히 대북정책은 지난 10년간의 햇볕정책을 부정하고 상호주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른바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행동계획을 세웠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국민소득 3천불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북한에 대한 왜곡된 관점으로 남북관계의 협력은 현 정부에서는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국교회는 계속적인 교류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2008년 부활절에도 남북교회는 하나의 목소리로 “전쟁과 갈등,” 반목과 질서의 현실로부터 자유하여 상호 교류와 협력으로 7천만 민족이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88년도 선언 이후 20년간의 교류와 신뢰를 쌓아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여타의 부문교류보다 공고한 연대의 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남북교회의 교류활동은 다소 활성화가 늦춰질 수 있으나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4. 한국교회 통일운동의 성과와 전망

 

  1) 한국교회 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대표되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진영은 하나님의 선교 신학으로 대표되는 신학이론과 7·80년대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해온 신앙에 근거해 세계교회와 더불어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한 실천을 계속해왔다. ‘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을 평가하기에 앞서 그 평가의 기준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영향력’과 ‘대중화’에 두었다. ‘얼마나 큰 사회적인 영향을 끼쳤는가?’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운동에 동참하였는가?'의 질문을 평가의 잣대로 사용하는 것이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준으로 한국교회 통일운동 20년 역사를 살펴보겠다.

 

  ‘88선언’과 그 선언에 따른 다양한 신학적 작업과 대중운동의 시도, 95년 ‘희년’을 향한 ‘인간 띠잇기’ 행사를 비롯한 대중행사, 부활절과 광복절을 맞아 남북교회가 한 목소리로 드리는 기도는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선지자적 역할을 해왔다.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인 사무엘 코비아 목사는 통일에 대한 단순한 논의나 언급만 해도 사법처리 되던 엄혹산 시기에도 화해와 치유, 평화를 만드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선포는 그 선포가 실현이 되어야 선포로서의 위상이 있는 것이다. 냉정히 평가하자면 한국교회의 선지자, 예언자적인 역할은 ‘88선언’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한 것에서 끝났다. 북한에 대해 한마디도 못했던 서슬 퍼런 시절 과감히 남북의 평화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이야기 했던 한국교회는 분단장벽에 파열구를 낸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역할은 선언을 벗어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도적인 움직임은 외침으로서의 기능만을 했을 뿐이지 현실에서의 분단극복으로서의 리더십은 발휘하지 못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대표되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진영은 ‘88선언’ 이후 한국교회가 평화와 통일을 위해 나아 가야 할 길을 제시하였다.

 

  한국교회 통일운동이 대중화 되지 안 된 구조적인 원인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는데 있다. 영향력과 대표성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대표되는 한국 에큐메니칼 진영은 여타의 교단이나 기독교 단체들 보다 월등하다. 그러나 대중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천명하는 성명과 그 밖의 대외 활동, 교류 사업에는 참석하면서 정작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교인들에 대한 통일교육과 구체적 실천제시에 열심 있는 목회자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성장과 교인들에 대한 기복과 심리적 평안추구만을 중심으로 목회활동을 해온 대부분의 교회 목회자들은 통일문제, 민족문제를 우리의 삶과 연관시키기를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성장제일주의가 주류인 한국교회에서 교인들을 모이게 하는 것은 그들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것일진대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보통 소신으로 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자가 교인들에 대한 심리적인 치유와 축복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역사적 책임과 사회적 참여 또한 교인들에게 교육해야 할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복이라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도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은 전체 교회의 지형에서 보면 소수에 속하는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조직이 전 교회를 대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각 교회의 목사로 대표되는 한국교회의 리더십이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인 진지한 접근과 반공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야 비로소 한국교회는 평화와 통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평화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평안과 구원, 성공을 위해 기독하고 축복해온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교육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난 2007년 8월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공동추죄로 “한반도 평화통일 국제 심포지엄”을 진행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 한국교회의 과제 중 ‘샬롬’이라는 평화의 개념을 성서에 근거한 통일관으로 수립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의 대북지원, 타종교와 사회단체와의 협력 등의 방안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2) 한국교회 통일운동의 전망과 제안

 

  이제 통일은 운동이나 이념, 선언이 아닌 생활, 사업, 구체적인 삶이 되었다. 제도나 체제의 통일은 분단이 만들어놓은 남북 간의 간격에 비하면 훨씬 쉬운 것이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형성된 남과 북의 골은 그 어떤 선언이나 화려한 운동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것이다. 생활과 문화를 통해 그리고 개개인의 삶속에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는 통일의 당위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라는 조직은 본디 전적인 타자를 위한 존재, 하나님의 선교의 전초기지이다. 이런 교회에서 통일의 삶을 구체적인 신앙을 통해 선교를 통해 대대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와야 통일은 가능할 수 있다. 교회라는 독특한 구조와 선포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 대한 새로운 ‘서로에 대한 앎’과 ‘평화’를 교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아주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근본적인 교육과 구체적인 ‘나눔’ 실천이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Ⅲ. 결론

 

  ‘아직과 이미 사이’라는 박노해의 시는 민중이 품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표상을 드러내 준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완성시켜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노정 속에 던져진 어려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아직 오지 않은 통일을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통일로 사는 것이 한국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분단과 전쟁의 비극으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 채 반세기를 보내왔지만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슴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으로 무든 모순과 아픔, 간극을 충분히 극복할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을 지향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자기 것을 희생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품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길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복음화 하자고 외치는 한국교회 일각에서의 주장은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나 가정교회는 가짜라고 전제한다. 그래서 예전에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이 그랬듯이 북한을 선교지로 여기는 견해가 적지 않다. 심지어 분단이전의 북한교회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전쟁으로 피난 내려온 실향민들에게 북녘의 땅은 빼앗긴 곳, 되찾아야 되는 땅이기 때문에 교회 또한 그렇게 복원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사람들의 신앙을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몇 안 되는 북녘의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우리의 생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에 한다면 그 주체는 하나님이 유일한 분이다. 그 외에 어느 누구도 북한교회를 좋게 든 나쁘게 든 평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한 형제요 같은 민중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을 알기위해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교류의 끊을 놓지 말고 더욱 확대해 나가야 한다.

 

  아직 통일의 문제가 확고하게 교계에 인식이 되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든 작은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많은 결실을 맺는다 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것이 진리라면 이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주저 말고 즉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은 많은 결실을 바라는 것보다도 평화라는 작은 마음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나눔의 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올바른 통일을 향한 자세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작은 자의 하나님 곧 민중의 하나님을 볼 것이다.

 

 

 

 

 

※참 고 문 헌※

 

기독교학문연구회 편 『민족통일과 한국 기독교』,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4.

평화와통일신학연구소 편 『평화와 통일신학 1』, 한들출판사, 2002.

임희모,『한반도 평화와 통일선교』, 다산글방,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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