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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ㅡ서툰 시

by noobim 2023. 2. 11.

- 은사님 퇴임 문집에 수록된 에피소드와 축시

중학교 2학년, 방과 후 문학반 수업 때였다. 태풍이 지나가는 것도 아닌데 유독 바람이 휘몰아쳤다. 학교 운동장 은사시나무가 실연한 여인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고,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되었는데, 선생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툭 내뱉으시는 한 마디.

- "시다! 이게 시야!"

그 문장을 발음하셨을 때의 어투와 뉘앙스.....그 삐딱한 멋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5살, 어린 소녀에게 시가 처음으로 찾아온 날이었다.
그러다 학창 시절을 지나면서 나는 점점 시를 잊은 사람이 되었고,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잊은 채 어딘가 삐딱한 목사가 되었다.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문득 선생님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넘게 연락도 없다가 찾아온 늙은 제자.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바람만 불면 울었다. 몸만 커지고 시를 잊어버린 자신을 미워하면서, 세월에 너울진 흰 싸리꽃 같은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시 같아서....

그렇게 울고 나면 시가 찾아왔다. 시가 나를 끝내 만나주었다. 바람이 불면 그래도 살아봐야겠다고 되뇌이게 되었다. 선생님을 뵙고 다시 시를 쓰게 되었고 그즈음에 쓴 시가 <싸리꽃 짚신>이다.

교직 34년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다. 얼마나 많은 시가 그 인생에 머물렀을까. 모쪼록 드리는 서툰 시가 한 자락 세월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싸리꽃 짚신

싸리꽃을 엮어
신을 만들어 놓았어요

작은 꽃이 으스러질까
여린 잎이 떨어질까
괜스레 두근거렸지요

새벽녘 초승달 빛에 다려
이 신을
돌 다듬이 위에 놓아드려요

살면서
살아오면서
가지 않고 싶던 길
돌아가야 했던 길
울며불며 가다가
거친 흙발이 되었겠죠

이제는
이 짚신을 신고
가고 싶은 길을 떠나세요

발에 닿아 흐드러진 하얀 꽃잎들과
바람을 타고 함께 간다면
그 길이 외롭지 않을 거예요

저도 곧 따라가렵니다
흰 꽃이 떨어진 그 길을 따라
당신을 따라

- 이정관, ≪살아있는 기억들≫, 휴머니스트, 2022, 183~18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