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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체휼하시는 하느님

by noobim 2020. 9. 2.

* 체휼하시는 하느님 <히브리서 4:12-16>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제가 어렸을 때, 잊지 못하는 선배님 한 분이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더 깊이 예수님을 알기 시작하였는데요.
그 시작에 이 선배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분식집에서 친구와 같이 떡볶이를 먹으며 수다를 한창 떨고 있었는데,
어떤 멀대 같은 대학생이 다가와서는 말을 거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자 하니 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장작 3시간이나 말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관심사에 대해서 한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인데,
세상에나 어린 저희를 붙잡고 3시간 씩이나 이야기 하는 사람이 그 선배였습니다.

저는 그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1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혼자 신나게 들뜬 마음으로 걸어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이야기는 참으로 생생했고 거짓말이 아니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그 선배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 계기로 학교에 있는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많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교회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가 곧잘 이야기 했던 예수님의 이야기 중 가장 은혜를 받았던 것이
바로 ‘체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시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이 옛날 성경으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라고
나왔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체휼하다 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는 연약함을 동정하다 라는 뜻으로 알 수 있지만
이것의 본 의미를 따라가면, 바로 상대의 사정을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다 라는 뜻이며,
내가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전인격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 선배는 본인에게 있어서 체휼하시는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두려움이 없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어려움 사정을 나의 아픈 마음을 그냥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나의 상황과 처지를 경험하시고 바로 아시는 분이라 너무 감사하다 했습니다.

그렇게 입버릇처럼 체휼하시는 하느님을 자랑하던 어느 날,
그 선배는 주님께서 겪으셨을 법한 고통을 경험하며 33세에 젊은 나이로 주님 품에 돌아갔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고통을 자신이 체휼하듯 말입니다.
그의 병명은 폐암이었습니다. 원래 골육암이 있었는데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폐로 전이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 선배는 신앙을 지키며
체휼하시는 하느님을 끝까지 의지했던 모습을 보였습니다.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이 선배 입에서, 그리고 암이 다 전이되어 말랐던 몸에서도
담대히 전하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귀에 쟁쟁히 울려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하던 대로 경험했고 경험한 대로 말했던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하루 하루를 살다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입니다.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많이 배웠다 해서 이 말씀의 자리가 두렵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이 자리에 설 때마다 말씀을 준비할 때 마다
하느님께서 저를 레슨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의 저의 삶을 두고 체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레슨의 시작에는 이런 질문이 항상 따라옵니다.

“잘 살았니? 내가 알려준 대로 말이야!”
“잘 살았니? 나를 그리고 너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체휼하는 마음으로 말이야!”

그럴 때마다 저의 대답은 쉽사리 아멘으로 나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꿀벙어리가 되어 자판 위에 손이 움직이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설교가 좀처럼 써지지 않아서 생각을 곰곰이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딱 마음에 와닿는 것이
‘아!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구나!'
'내가 체휼하는 마음이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았구나!’ 라는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느님의 마음으로 옆 사람들의 상황이나 마음을 체휼하지 못한 채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 예리하지 못한 무딘 검을 가지게 되어
도무지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게 되는 사실을 저는 깨닳았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저의 소임이기도 하지만
여러분께 전하는 저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신앙 고백이 살아 있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혼과 및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저의 마음의 품은 의도와 생각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삶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 한 모퉁이 모퉁이마다 새겨지는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한번 14절의 내용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다시 읽어 드리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체휼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신앙 고백을 하느님 앞에 드려야 할까요?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위하여 어떤 이들은 어느 곳에 모여 소리로 외칩니다.
사회의 화근이 된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녕 바른 신앙 고백일까요?

이것이 비단 이것이 광화문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해당이 될까요?
돌이켜 보면, 나의 삶에도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닌 나를 자랑하는 순간들이 나타내 질 때가 있습니다.
또는 입으로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여 다른 곳으로 행하는 나의 연약한 모습들이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입으로 하는 신앙, 나를 드러내는 신앙, 다른 곳으로 행하는 신앙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이기 때문에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습니다.
영향력이 전무하고 힘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살아야 자판 위에서 글을 쓰고 설교를 쓰고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듯이,
작지만 신실하게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그에 따르는 삶의 행동들이 있을 때,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예수를 나의 주로 시인하며 살아 있는 신앙 고백을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잠깐 제가 작은 메모지를 준비했습니다.
제가 저번부터 시도하고 있는 것이 함께사는 설교입니다.
원래 전형적인 예전에는 말씀이신 하느님과 설교를 전하는 설교자와과 청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추세는 설교자도 청중도 다시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듣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이런 아이디어를 내어 봅니다.

제가 나눠드린 종이에 나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간략하게 써보는 것입니다.
체휼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오늘 주제에 더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쓰실 때, 길게 늘어쓰지 말고
이를테면 사랑의 하느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고치시고 싸매시는 하느님
이렇게 자신의 신앙고백을 이 종이 위에 써보고
나만의 신앙고백 위에 나의 삶에서 실천해야 할 사항이 무엇이 있을지 써보는 것입니다.

저의 상황으로 말씀드리면 저의 하느님은 고치시고 싸매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이번 한 주간 마음과 몸이 아픈 사람들이 없는지 생각해보고 기도하겠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도 적어보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생각난 힘든 사람들에게 비타민 음료수를 건네어 주겠습니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일주일을 살아보려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휼해 봄으로서 그것이 나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같이 한번 해볼까요? (잔잔한 음악으로 반주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한번 나눠보도록 합시다.
여러분의 하느님은 어떠한 하느님인가요?
그 신앙고백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실 것인지 나눠보도록 합시다. (3명 정도 나눔)

네 그렇습니다. 아주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네요.
중요한 사실은 여러분이 그렇게 하느님께 앞에 나만의 신앙 고백으로 살 때,
어떨 때는 아, 내가 손해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7장 2절에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기억하신다면
그 믿음과 같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건히 지키시도록 하루 하루를 함께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그렇게 이웃을 체휼의 마음을 가지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갈 때,
이웃의 상황과 어려움만 보며 도와주는 것으로 끝나게 될까요?
답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입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15절에 기록되기를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내가 아닌 이웃을 위해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갈 때,
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마음이 이러한 마음이겠구나 라고 그려지고 헤아려질 것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을 직접 경험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처럼,
나도 남을 위한 마음을 헤아리고 체휼하게 되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그의 마음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2장 5절~8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시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마음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마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기를 자처하신 마음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체휼하는 마음을 가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몸소 알게 되고 그 마음이 다시 선순환되어 이웃에게로 향하여져서
나의 신앙은 더욱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위로부터 흐르는 마음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웃을 향해 흐르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해 더 큰 강물로 잇대어진다고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말씀에서도 기록되어 있듯, 그 마음은 위에서 아래로 온 마음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이웃을 향한 체휼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굳건해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잇대어져서 더 큰 은혜의 강물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알면 정체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자연스레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의 말씀에서도 성전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백성이 드리는 삶의 예배가 거룩하게 회복될 때
그 영향은 온 땅 가운데 미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물이 더욱 풍성히 흘러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할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향하여 체휼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우리 안에 부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어 담대하게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하느님은 누구인지 그 하느님을 마음에 심어 체휼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겨보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을 들고 나갈 때, 아, 내가 부족하다. 환경이 어렵다. 라고 주저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마지막의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때에 주시는 도움을 구하며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그 신앙 고백을 이루며 살고 있나요? 그 신앙 고백이 살아 있습니까?
그 신앙고백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이웃을 헤아려 보는 연습으로
체휼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앵무새처럼 남을 따라 반복하는 신앙고백이 아닌 나만의 하느님을 만나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삶 가운데에서 이웃을 돌아보아 헤아려 볼 때,
그 체휼하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 주시며 우리의 신앙이 정체되지 않고 흐르게 하시며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 고백이 더욱 살아있게 도와주시는 것을 염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하며 오늘 말씀 가운데 다짐했던 실천 사항들을 해보시면서
하루 하루 주님을 의지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제 때에 도움을 주시는 그 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는 주님
이 시간 그러한 주님을 고백함으로 담대하게 나의 이웃과 세상 가운데 나아가려 합니다.
다시금 마음을 잡고 신앙을 이루기 위하여 나만을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남을 헤아리고 체휼하는 마음으로 사는 가운데 예수를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신앙의 고백이 살아 운동력이 있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안에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의 삶을 잇대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되기 원하오니
매 순간 나의 삶 가운데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때에 따른 자비와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체휼의 하느님을 다시금 만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이 모든 말씀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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