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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기억하시는 하나님

by noobim 2021. 9. 12.

기억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9장 14절~21절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19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20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21 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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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이곳에 계신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함께 하시길 원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냐라고 묻는다면 바로 나오는 대답이 아마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여타 다른 종교들을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보게 되면 그 종교의 중심이 되는 신 중에는 어떤 신도 ‘사람’을 ‘사랑’하는 신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요? 바로 그 종교를 사람이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사람이 주체가 되는 종교, 거기에는 사랑의 영원성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더욱이 신을 반역하는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하나님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참 사랑이 되시며 온 천하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아시고 ‘사랑’을 몸소 행하신 분이심을 이로써 확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랑의 극대치인 부모의 사랑으로서 오늘 본문을 통해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동안에 만약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하고 계셨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을 깨달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바라보게 되면 바벨론에 종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제가 앞서 오늘 본문은 아비와 자식의 관계 가운데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고 했는데 조금은 이상한 배경 설정이 아닐 수 없는데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즐거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신다면 이런 고통은 면하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다 하나님만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48장 10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 성경으로는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라고 나와 있지만 이를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게 된다면 ‘너를 고난의 풀무 풀에서 시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향한 더 좋은 계획을 실행하셔야 하는데 왜 시험하실까요? 이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도 맞고 자랐던 것을 기억합니다. 어느 날은 밥상머리에서 제가 아버지보다 숟가락을 먼저 들었더니 참으로 호되게 혼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싫어하시나 생각이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자기 자식이 남에게 욕듣지 않게 하려고, 사람 구실하게 하려고 본인 마음이 아프지만 자식들에게는 호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그렇게 혼내시고 밥상머리에서 어떻게 하시는지 한참을 수저를 안 드시더라고요. 어떻게 하나 보자 하는 심성이셨겠지요. 저는 그때를 기억하고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무심하게 고기 반찬을 올려주시더라고요.

하나님께서도 아무런 고난 없이 그냥 내버려 두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바벨론의 노예로 끌려오게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부모 된 도리로 내 자식으로 삼으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풀무질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바벨론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아프더라도 내 자식이니까 내 자식답게 살게 해야 하니까 풀무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결론이 아닌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에 꼭 필요한 복선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서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징벌이다 라고 생각하여 14절과 같이 한탄합니다.

14절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풀무질을 하고 계신데 도리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린 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우리를 분명히 기억하고 계신데 거기에 다가 하나님이 날 잊어버리셨나보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지?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기억치 못하는 것은 항시 내 쪽인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내 쪽으로 돌이키라고 풀무질하는 것 같이 내 영혼이 바싹 바싹 타버려 버리는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가 당장 생각하는 것은 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혹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치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풀무질을 당할 당시에는 왜 나만 그래! 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야기를 바꿔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생각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구나 또한 그 사랑이 변하지 않는구나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함께 15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제가 아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어머니가 자신을 낳을 때쯤에 각혈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이상한 것 같아서 검사를 해보니 의사로부터 말기 암이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당연히 아이는 또 가져도 되니 아이를 포기하고 항암치료를 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버리고, 억지로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치료를 포기하고 아기를 선택한 것이죠. 그렇게 해서 목사님이 태어나고 20일 동안 젖을 물리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의 말로는 어머니가 눈을 못 감고 죽으셨다고 합니다. 물론 요즘 자식들을 버리고 학대하며 죽게 만드는 부모도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라면 젖먹이를 떼어 놓고 떠나는 어머니가 어떻게 편히 눈을 감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디자인하실 때, 자신의 성품이 깃들게 디자인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우리 안에 심어놓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늘상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려 죄에 팔려가고 실수하고 실패하지만, 우리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한 가닥 소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자녀들의 사정과 형편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기억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예 손바닥에 각인시켜 놓으셨기에 잊어버릴 수가 없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찢기신 상처 안에 깊이 각인 된 주님의 친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이것을 한참 인기리에 방영하던 응답하라 1988을 들어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보면, 뭐 찢어지게 가난한 선우네 집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선우댁의 친정 어머니가 가끔 오시는데요. 암행어사 출두처럼 갑자기 고속터미널에 내리셨다는 친정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순간, 집안이 발칵 뒤집어 집니다. 궁색한 형편을 들키지 않으려고 선우 엄마는 집안을 발칵 엎어 한바탕 쇼를 벌입니다. 텅텅 비어있는 연탄광은 정환이네 연탄을 빌려 채워놓고, 빈 쌀통 앞에는 쌀푸대를 빌려다 세워놓습니다. 텅 빈 냉장고까지 정환이네 냉장고를 털어다 채워놓고 화려한 꽃무늬 스카프까지 매고 나면 마침 친정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그녀의 눈은 순식간에 연탄광으로, 쌀통으로, 냉장고로 움직입니다. 다 채워진 것을 보고는 선우엄마에게 ‘잘 지냈나?’ 하고 안부를 묻고는 그때서야 비로소 선우네 엄마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탁기 위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꼬깃한 만원 짜리 몇 장인데요. 옷이나 하나 사 입으라는 편지와 함께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아도 마당에 걸쳐 놓은 나달나달해진 옷들이 그 눈에는 보였던 것이죠. 그 마음을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발견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식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는데 부모들의 눈은 고성능 레이더입니다. 자식에게 뭐가 필요하다 싶으면 부모 눈엔 그것만 들어옵니다.지금 당장 뭐가 필요한지 알 뿐 아니라, 일주일 후에, 일 년 뒤에, 십 년 뒤에 뭐가 필요한지 자식들은 모르지만 부모들은 다 압니다.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무너져 버린 성벽, 불에 타 그을려 사람이 살 수 없는 처량한 성벽이 항상 하나님의 눈앞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거기 평안히 살며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던 그 예루살렘에서, 맨발로 끌려간 자식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고, 남의 땅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는 내 자식의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직접 보지 않아도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구체적인 사랑 표현의 방식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저 멀리 우주 너머의 초월적인 그런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히 살펴보시고, 우리의 모든 환경과 형편을 헤아려 주시는 살결 같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게 힘든 나날을 살아가며 스스로 낙담해 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서둘러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7절과 18절입니다.

17 네 자녀들은 빨리 걸어서 돌아올 것이다. 너를 헐고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갈 것이다.
18 수많은 무리들이 네게 올 것이고 신부를 꾸미는 장식처럼 너를 두르게 될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위기와 고난이 있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그 삶을 회복시켜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기소침해서 처지를 한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불신입니다.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때가 차면 하나님의 계획을 행하실 것을 예고하셨음에도 그들의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스스로 처량하게 생각하며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비로소 세상 가운데 근심하여 유리하고 있을지라도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너희를 잊지 않는다, 너를 회복시킬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된 우리 믿음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원상복귀가 아니라 더 확장되고 풍성한 생명의 길로 향합니다. 20절~21절입니다.

20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21 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우리의 낙담한 눈으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죽음의 시간, 폐허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둥절한 행복이 어디로부터 기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녀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에 우리에게 소망이 존재함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우리를 풍성한 회복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까? 누군가는 이러한 영화와 번영이 회복의 산물 또는 결과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회복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보다 구원의 관점으로 더 기울여서 생각을 하여야 더 맞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풍성한 회복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를 통해 구원받을 많은 사람들을 보태기 위해서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회복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그분의 자녀 삼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나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교회 안에 있는 우리만을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를 모르고 유리하는 영혼들을 포함합니다.

우리 아이가 귀하면 옆집 아이도 귀하듯이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주님의 자녀를 기억하시는 일이 꼭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만이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 교회의 성벽 너머에 있는 영혼들도 하나님에게는 잃어버린 자식입니다. 바벨론에서 되찾아야 할 아들과 딸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름 뿐 아니라 모든 영혼의 이름을 손바닥에 기록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 영혼들을 바라보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렇기에 이미 돌아온 자식에게 회복을 풍성하게 하시는 이유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시기 위해 주님의 자녀들을 더 보태시기 위함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되십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친자식으로 기억하십니다. 갈하고 힘든 날이 반복될지라도 낙담치 말아야 할 이유는 아버지 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시 기억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들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것은 더 확장되어 이 교회의 성벽 너머에 있는 아직 죄의 종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함께 무너진 성벽 안에서 사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짐으로 우리 또한 주님의 손바닥과 같이 그들의 이름이 우리의 손바닥 안에도 선명하게 새겨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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