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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소개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없애고- 이기리의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시평론

by noobim 2022. 1. 6.

1. 들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원론적인 이야기이겠지만, 이 질문은 마지막 학기를 앞에 둔 나에게는 꽤나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다. 물론 시를 쓰는 한 평생을 따라다닐 질문이겠지만, 그걸 잘 몰라서 여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발견한 두 책이 있다. 하나는 알다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이라는 책이고 하나는 이기리 시인의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였다. 이 두 책의 연관성은 다름 아닌 기억에 관련한 트라우마 재생법에 있다.
알다이다 아스만은 그의 책의 초반에 시인의 역할과 시인이 시를 왜 써야하는지에 대해서 음유시인인 시모니데스의 일화를 빌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테살리아의 왕 스코파스의 초대로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낭송했는데 그 왕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시에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들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리하여 약속된 보수를 절반만 지급하였고 그가 당혹감에 빠져 있는 사이에 밖에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들일지도 모를 청년 두 명이 찾아왔다는 시종의 말에 연회장 밖으로 나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연회장은 무너지고 시모니데스는 생존자를 찾아다녔지만 신원도 확인하기 어려운 시체들만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과 자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유가족이 시신을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시모니데스와 이기리의 연관성을 살펴보자면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 즉,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시인은 어떤 기억에 대한 ‘애도’를 행하는 사람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모니데스가 행한 애도는 타인에 대한 것이지만, 이기리 시인의 애도의 대상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시인의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왜 인간은 두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볼 수 없을까’에 대한 의문으로 그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기를 원하며 이는 그의 시집의 첫 장에 수록된 시를 통해서도 발견하게 된다.

 

 

아이가 돌에 묻은 흙을 턴다
모래가 바람에 날린다
돌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것을
아빠에게 건넨다
아빠는 고개를 젓는다

돌을 놓친다
아이는 작은 무릎을 감싸며
몸을 동그랗게 만다
떨어뜨린 돌 주위에
모래 알갱이들이 사방에 퍼져 있다
깨진 돌 하나가 밀려오는 물을 받아
축축해진다

아이는 깨진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다시 아빠에게 건넨다
손바닥에 놓인 돌이 반짝인다

이건 주는 게 아니란다
딱딱하고
깨졌고
더럽잖니
얼른 그것을 버려

<중략>

바다는 수많은 돌들을 바닥까지 끌어당긴다
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아이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 「가넷 - 탄생석」 부분



  누구에게나 있어서 가면을 벗은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의 트라우마는 무의식 속에 저장하고 그것에 대해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질을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 속의 화자인 아이는 자꾸만 ‘딱딱하고 깨졌고 더러운 돌들’을 ‘아빠에게 다시 건네고’ 있으며, 이 돌들은 화자의 트라우마를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빠의 관점에서는 그저 아이에게 그 돌들이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지만 화자의 관점에 있어서 이것은 ‘축축하지만 반짝이는’ 아프지만 아름다운 존재로 대두된다. 이처럼 화자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무의식의 ‘바다 속 밑바닥까지 있는 수많은 돌들까지 끌어당기고’ 있다. 이러한 행위로써 이 돌에 대한 주인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속하게 된다. 시인은 이 시집 안에서 자기 자신을 회피하지 않고 ‘뒤 돌아보는’ 애도의 방식으로 자신 자신과 마주한다.
본 평론에서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 자신 스스로를 직면하며 애도하는 방식을 시간성에 대입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2. 담담한 계절감으로의 ‘과거’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중략>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중략>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중략>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중략>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부분


예배가 끝나면 친구들과 모여 성경 구절을 나누었다

그날은 한 구절도 준비하지 못해 모임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이름도 모르는 친구가 사탕을 주며 웃어 주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한목소리로 읽던 날이었다

<중략>

현관문을 열자
옆방에서 어떤 남자아이가 나와
내 입을 틀어막고 나를 소파에 강제로 눕혔다

<중략>

바지가 반쯤 벗겨졌을 때
친구가 다른 방에서 나왔다
구김이 많은 잿빛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집으로 거의 다 돌아와서 본 한쪽 신발 뒤꿈치가 꺾여 있었다
산책이나 하다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 「여름 성경 학교」 부분


  이기리 시인의 시집에서는 시인이 학창 시절 학교 폭력을 당했던 정황들(「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명당을 찾아라」, 「구겨진 교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청소년기의 불안한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여름 성경 학교」, 「두 개의 얼굴」, 「싱크로율」) 시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어쩌면 다른 이들은 숨기고 싶은 일들을 시집의 1부에서부터 ‘이것이 내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들에서 엿보이는 특이한 점은 시인의 화법이다. 대부분 이러한 시들은 ‘내가 이러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나를 위로해 주세요. 또는 ’이렇게 난 힘들었어요.’라고 말하기 십상인데, 이기리 시인은 그렇지 않다. 뒷 표지에 기록된 김언의 평처럼 결핍된 시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균형감’을 지니고 있었고, 시인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자신의 지난 과거를 긴장과 이완의 구조로 문장을 배치함으로 시에 흡입력을 지닐 수 있게 하였다.
이를테면, 위의 시 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서 첫 문장을 바라보면, 시인은 화자의 억압되었던 감정이 폭발시키면서 시를 바라보는 독자의 텐션을 화자와 함께 공감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 텐션을 끝까지 일정하게 유지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변주함으로 힘의 주도권을 가해자에게 돌리게 된다. 그리하여 화자는 교실부터 복도, 화장실까지 괴롭힘이 들러붙는 와중에, 잔인하게 치켜 올라간 아이들의 입꼬리는 나를 천장까지 잡아당기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나를 비웃던 ‘입꼬리’는 ‘시소’의 이미지로 연결되고, 화자는 ‘시소’를 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힘이 ‘같아지는 낮과 밤의 길이’를 선망하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지’에 대한 가능성을 묻게 되면서 이 고통스러운 ‘여름이 이제 곧 끝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비를 맞는 표정’으로 대면하게 된다.
  또한, 「여름 성경 학교」에서도 ‘모르는 친구가 사탕을 주며 웃어준’ 일이라든지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한 목소리로 읽던 날이었다’ 라는 구절을 제시하여 독자로부터 안정감을 제시하지만 이 또한 ‘옆방에서 어떤 남자아이가 나와 내 입을 틀어막고 나를 소파에 강제로 눕혔다’라는 것으로 상황을 뒤틀어 놓는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신발 뒤꿈치가 꺾여 있는’ 불온한 상태에서도 ‘산책이나 하다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는 담담한 표현을 쓰면서 시에 완급을 노련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러한 완급 조절은 시인이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을 더욱 깊게 만든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온 현재의 나는 그 아픔들을 담담히 풀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1부의 끝장에서 ‘샌드위치와 초코우유를 먹는 아침에서 닭갈비에 맥주를 마시는 저녁으로, 전화를 걸지 못한 저녁에서 집 앞에 서성이는 아침으로. 조깅하는 천변에서 늙은 와인을 마시는 스탠드바로. 바뀌고. 어쩌면.’(「계절감」)이라는 문장으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고 있으며 더 이상 과거의 시간을 두고 바라볼 때 그것이 더욱 단단한 나를 만들어 줄 계절로 바뀌어 갈 것이라 기대하며 나아가고 있다.

3. 수많은 등장인물을 없애고 새로 쓰는 ‘현재’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없애고 나 혼자 숲에 남겼다

콧등을 스친 낙엽을 주웠다 완전하게 다 떨어진 낙엽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부를 이름이 없었다 그것을 세게 쥐었다 파사삭거리는 소리를 듣자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중략>

숲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곳만 맴돌고 있는 것 같아서 인물이 더 있었더라면 각각 하나의 숲을 나눠 가지고 각자 좋아하는 나무를 하나씩 끌어안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단 한의 숲을 걷거나 이 이야기의 끝을 생각해 보는 것뿐이었다

자전거도 없고 종종 죽은 뱀을 보기 일쑤였다 나는 이 이야기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발길이 닿는 곳마다 숲에 있는 식물들을 모두 꺾어 버렸다

<중략>

꺽인 식물들이 처음부터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 「유리온실」 부분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근거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대답하려면 현존재의 특정 양식을 현상적으로 제시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즉, 현존재는 실존함으로써만 매양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그려낸 실존의 특정 양식은 수많은 등장인물을 지워내고 자기 자신이 혼자 오롯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작가가 이야기를 뒤엎고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을 위해 컴퓨터 커서의 좌표를 영점(「러브게임」, 「염소가 사는 좌표평면의 세계」)으로 올려놓듯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화자는 혼자인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화자는 누군가가 떠난 “구겨진 자리”(「오로라」)를 바라보며, 함께 있지만 입속에서는 ‘차갑고 딱딱한 것이 깨’(「재회」)져 버리는 한순간, ‘당신과 멀어질수록 환해지는’(「빛」) 자기 자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상황은 혼자로 놓여지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화자에게 펼쳐지기보다 ‘빈 방의 문을 닫은 채 자신의 울음소리를 더 정확하게’(「변안곡」) 들으려 하는 ‘나만의 의지’(「자각몽」, 「어느 하루」,「오로라」)가 깃들어 있다. 이기리 시인은 그것을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차용하며 이 안에서 화자는 타자가 말하는 나가 아닌 나 스스로가 말하는 나를 대면하면서 자기 실존의 객관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너는 꼭 가지 않아도 돼요」)
  이기리 시인에게 있어서 자기 실존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시도는 그것이 다시금 타인과 (「재회」)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네가 듣고 싶은 말을 내가 할 수 있을’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또한 소중한 존재를 모두 다 태우고 난 후에야 그 되돌릴 수 없는 잔해를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처럼(「사랑」) 누군가를 공들여 지워가려 했던 그곳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흔적을 실감하게 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시인은 “아무도 없는 테니스장”에서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러브게임」) 주고받는 그 텅 빈 랠리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4. ‘충분한 안녕’으로 부르는 ‘미래’

 

 

<상략> 삼월엔 항상 내가 먼저 감기에 걸려서 맑고 깨끗한 국물을 먹고 싶다고 말하면 당신과 함께 연포탕을 끓여 나눠 먹었고, 그해 유리그릇에 담긴 식혜를 함께 후루룩 들이마시고 꾸덕한 밥알을 씹던 여름엔,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해보다 용서가 더 필요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던 서해에선 서로의 구두가 무척 닳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중략>.....나는 당신의 무릎을 베고 떠오르는 해의 밝음과 저무는 해의 밝음이 다른지 물어도 보고 싶었지만 오래 본 얼굴을 더 오래 보아야 나는 아프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세밑」 부분

 

<상략> 당신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오로지 나의 휴식을 알리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중략> 길을 걸을 때마다 밑장 대신 방향이 구겨지는 나날이었지만, 구겨질 방향조차 없을 곳을요. 유일한 창살을 만져봅니다. 차갑습니다. 너머에 있을 풍경을 의심합니다. 믿음을 연습합니다. 먼저 탈출한 사람이 나를 꺼내 줄 거라고. 나는 그런 사람을 오래 기다리기 위해 벽을 치다가도 노트를 편 셈이지요. <중략> 나는 아직 우리가 죽어서도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죽어서까지 나를 만나 줄 사람이 몇 명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맹목적 태도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나를 맘껏 부려먹기를. 누군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웃을 수 있다면. 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까.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의 웃음이 당신의 웃음이고 나의 기쁨이 당신의 기쁨이라면. 나의 말이 당신의 심장을 몇 번 더 뛰게 할 수 있다면. 나, 더 살아도 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기를 바랍니다. 나의 글이 당신의 글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어려운 순간이 와도. 나는 당신을 끝까지 믿겠습니다. 당신은 부디 먼 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기를. 우리, 또 닿을 날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이만 줄입니다.

-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 부분

 


  시인의 애도는 자신의 실존 방식을 통해 발현되지만 이것이 단지 자기 자신에게로만 국한되는 것을 넘어 타인에게로 향하는 순환의 구조를 이루게 된다. 그렇기에 그의 시들을 살펴보면, 신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말을 걸며 이로 인해 자기 내면의 모습을 자각하게 된다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이 떠오르게 한다.
화자는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타자를 인식하며 ‘오래 본 얼굴을 더 오래 보아야 아프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세밑」) 비록 타자와 나 사이의 ‘흔들림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그 자리에 서로가 마주 앉’(「더 따뜻한 차를」)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 안에서 화자는 오히려 더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이제는 나와 타자에 대하여 ‘이해보다 용서가 필요하다‘(「세밑」)고 말하므로 그 화해의 지점을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시인은 「너는 꼭 가지 않아도 돼요」에서 보이는 것 같이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문장의 주어를 자유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확장성은 ‘나의 웃음이 당신의 웃음이고 나의 기쁨이 당신의 기쁨’이다 라는 표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비로소’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라는 공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 화자는 이러한 인식을 자신의 생이 존속될 수 있도록 하는 삶의 동력으로 삼아도 될지(「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에 대해서 단정하지 않고 내가 된 타자에게, 타자인 나에게 묻는 행위로 연결시켜 준다. 이로써 영점 좌표에 커서를 놓았던 시인은 이 내면적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등장인물을 재배치시킴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리 시인의 그의 작품에서 사용한 애도의 방식은 나 자신과 타자를 직면하며 그 상호관계성 속에서 발화되는 화해이다. 이는 화자가 아픈 과거에 메이지 않고 그것의 트라우마의 기억에서 벗어나 ‘타인을 끝까지 믿는 맹목적 태도’로부터 그 이야기의 미래성이 탄생되며, 시인은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모양’으로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빛의 모서리들을 껴안고' 인사할 수 있는 '충분한 안녕'으로 미래에 가닿기를 바라고 있다.

5. 나가며

  하루 하루를 살면서 나와 타자를 생각하는 일이 생의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하면 영혼의 살갗과 함께 뜯어지고 없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우리는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한 사람을 질리게 미워해서 만든 노래를 하루 종일 입속에서 돌돌 굴려 보기도’한다. 이기리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이게 다 자신과 타인을 멀리 보지 못해서(「더 많은 것을 약속해 주는」) 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고통의 기억을 시로서 애도할 때, 타인(대상)과의 적정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해서 객관성이 도출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담담함이 나와야 할 부분에서 설명적으로 시가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 또한 이 부분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번 시집을 평론하면서 그것 또한 「괜찮습니다」라는 위로를 받게 되었다. 시인의 문장처럼 타인과 나와의 거리는 ‘말랑하고 탱탱한 도토리묵처럼 너무 힘을 약하게 주면 놓치고 너무 힘을 세게 주면 갈라지고 말지’만 오래도록 ‘등을 말고’ ‘몇 번이고 들어 보는 얼굴’이 있어야 시인이 탄생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것은 다름 아닌 나와 독대하는 일인 것이다. 나와 솔직하게 마주보는 일이다. 내가 가진 고통과 트라우마의 기억을 여실히 바라보고 직면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와 타자에 대한 화해를 이루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임을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마음으로 시를 쓰면 되지 않을까? 이제 이기리 시인과 같이 피하지 않고 영점 좌표에 커서를 올려놓아 나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참고 자료*

- 이기리,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민음사, 2020.
- 알다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그린비, 2011.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경문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