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5

네모 앞에서 2021. 9. 2.
쿠킹 클래스 아기 궁둥이 같은 빵을 바라보며 읍내 빵집으로 시집가고 싶었던 엄마는 과묵한 전기공 사내와 쪼글거리며 사십년 째 숙성되어 가고 있기에 부탁이 있단다 그러니까 딸아! 다음 쿠킹 클래스에는 흰 뼛가루 같은 이스트를 저 동산 위에 뿌려주겠니? 딸은 아빠를 닮았으므로 대답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엄마는 아가를 잃어버리지 않게 포대기로 꽁꽁 묶어 다녔다던데 이번 클래스에서는 그 동안의 마음처럼 소리도 없이 까맣게 빵을 태운다. 2021. 8. 13.
나란히 거실에 화분 놓을 자리를 찾습니다 진열대의 받침이 보이지 않아 창가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새들이 앉아야 할 전깃줄에 화분이 걸쳐 있으므로 안과 밖의 풍경이 어색하게 어울립니다 이게 맞습니까? 집배원 아저씨는 매번 이름을 궁금해 하고 ‘희’가 아니라 ‘히’입니다 나를 알면서도 잘 모르는 이의 편지들을 받아들고서 화분에는 이렇게 적습니다 - 부사(副司)로 살고, 선(線)은 없습니다. 2021. 8. 13.
이야기 숲 나무에 기대어 서면 이끼로 재가 그어지고 이마에는 어떠한 자국이 남습니다. 흙으로 시작되고 어느 날 끝이 되어 흩어진다며 잊지 말라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자신의 이파리로 반함(飯含)을 써주는 나무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나는 노래하고 그 중 빨간 것을 주어 갈피로 엮어보면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처음은 이파리를 들고 숲을 건너간 당신의 안부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2021. 8. 13.
옥잠화 길을 걷다가 꺾은 꽃 한 송이 매일 새 물을 주어도 시들었던 것이 네가 오면 마르지 않았다 내가 아는 나와 낯선 나를 견디며 길어진 손톱들과 너의 이름을 새긴 수많은 꽃 지방(紙榜)들 가난한 마음으로 웅덩이와 웅덩이 사이를 안아보면 성실한 권태에도 사랑은 이렇듯 물길을 내어 흐르게 하고 고인 아픔은 옥잠화 한 송이로 맑게 피어난다. 2020. 9. 1.
소리 스스로를 가두는 검은 시간의 방 옥합 안에는 수 많은 바늘들이 버려져 있고 별 다를 것 없는 창 밖 풍경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가득 가득 태어난다 탄생의 범주는 어떠한 의도도 가지지 않는 것 문을 열고 나가면 나는 어떤 소리로 남을까?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아* 웅크린 아프락사스에게로 간다 - *박판식 교수님의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에서 인용함. 2020.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