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상념-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by noobim 2020. 8. 18.

 

故 문준경 전도사의 실 사용 성경책, 초기 한국 교회의 순수한 신앙의 흔적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에게 글이란
좀 더 나은 사람이길 바라여서
의존하는 도구같은 것이다.

그러면 아주 조금씩은 나를 점검하게 되고
또한 옆 사람들을 알게 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게 글이란 참회의 도구인 셈이다.
다른 이들의 글을 읽고 공부할 때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하고서는
이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커버되지 못한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된다.

이처럼 신앙은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확인하게 하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요즘 들어 공부하는 일이 더 재미있어졌다.

무엇에 대한 자격증을 따는 일이 아닌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공부들..

그 공부들 덕에
더욱 나 자신을 경계하고 점검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공부하는 일들을 시작한 후에

또 다른 변화는
누군가에게 쉬이 다가가는 일들이
조심스러워 졌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어떤 안부를 묻는 일,
상대에 대한 상황을 짐작해 버리는 일,

나의 기준에 따라 그 사람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일...

쾌활한 성격이라 생각하던 이들에게는
반전이겠지만...
실은 나는 낯가림이 무척 심한 사람이다.

동안 들키지 않으려 웃고 떠들던 모든 일들이
이제는 그리 쉬운 일이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모든 일을 삼가하려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 속에서
'되어야 하는 나'와 '원래의 나'가 충돌한다.

즉, 나에 대한 갭 차이가 많이 난다는 사실에
내가 사는 하루 하루가 진짜처럼 느껴지지 못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칸트를 공부하고는 진리라는 것이
개념과 대상의 일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박판식 교수님의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문장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나가 개념이라면
대상이라는 것은 원래의 나이다.

이 개념과 대상의 일치를 위해
향하여 나아갈 뿐 완성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장이 확 와닿았다.

그것의 일치가
나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하느님의 힘이 아니면,
진리 추구의 삶을
지속될 수도, 완벽하게 이루어 낼 수도 없음을 깨닳았다.

내가 원하는 나와 원래의 나 사이의
괴리감을 줄여 나아가기 위해
하느님 앞에서의
참회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상태는
나의 경우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그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리라..

-

요 몇일 사이에
마음에 크게 자리 잡은
우울감과 상실감들...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
누군가를 말하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고는 하나

불의한 일에 침묵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에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진리 추구를 행해야하는 사람이
괴리감의 폭탄이 되어 날아오는 모습들....
인간됨이 없는,
무질서한 상황을 증폭시키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시국에 모여 앉아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 라는 슬로건을 현수막으로 내걸고 있다.

이는 독일 신학자인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의 말로 본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할 독일교회가 오히려 히틀러를 따르고 있음에 한탄하여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 한 말인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의 규탄을 선동하기 위한 말로 왜곡되고 있었다.

이러한 슬로건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하느님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이 슬로건을 걸기 전에
보수 정치를 선동하기 위해
세속에 복종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보통의 일
일 것인데
자신의 자만으로
세상에 큰 혼란만 기여하게 되었다.

개신교의 잘못이 크다.

오래 전부터 세상 사람들이 개신교를 우려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 보수 기독교가 잘못했으니
모두의 잘못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어찌되었든, 현재 개신교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개념과
그리스도인이라는 현재의 대상이 일치되지 않는 상황
에 이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진리가 없는 깡통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에
진정한 참회가 너무나도 절실한 때에

예수님은
모여 있는 사람과 그것을 주동한 사람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실까?

오히려 내 눈에는
그들이 슬로건으로 건 본 회퍼의 말이
그곳의 우매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역설적인 하느님의 뜻
으로 보인다.

이게 전혀 과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에

불면과 상념만 짙어진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어도 괜찮아요  (0) 2020.08.21
안부  (0) 2020.08.20
회귀의 일상  (0) 2020.01.14
거시기  (0) 2020.01.14
그 날의 이야기  (0) 2019.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