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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소설 다시 읽기

황석영의 『손님』

by noobim 2020. 8. 20.

* 『손님』을 통해 바라본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1. 줄거리

 

황석영의 『손님』은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책은 주인공 목사 류요섭이 미국에서 40여 년을 살다 고향인 황해도를 방문하게 되는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하여 바라본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우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지향점에 대해 서술해 보기로 한다.

 

2. 과거 - ‘헛것’을 통해 본 역사적 사실

 

작가가 ‘손님’이라 규정하는 ‘기독교’와 ‘막스주의’가 민족의 갈등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면 그 계기를 바탕으로 일어난 크나큰 비극이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대학살 사건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주인공 류요섭 목사와 그의 형 류요한 목사는 몇십 년 전, 고향 신천에서 벌어진 처참한 사건을 잊지 못한다. 형의 죽음을 뒤로하고 고향 방문길에 오르는 류요한은 신천의 ‘학살박물관’을 방문하여 끔찍한 전시물을 관람하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요한형이 관련된 당시의 참극들을 떠올리고 몸서리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잡다한 종류의 신발 무더기를 보았다. 우선 여자의 흰 고무신이 보였다. 그것은 두 짝이었는데 하나는 중동이 끊어져 있었고 색깔도 누렇게 퇴색되어 있었다. 찌그러진 구두, 그리고 아직도 녹슨 못이 튀어나온 구두 뒤축들, 아이들의 작은 검정 고무신...(중략)...그것들의 임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 누군가의 발을 담았던 물체는 그래서 더욱 부재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손님』, 100쪽)
실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이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50년 10월 17일에 자행되었다. 작가는 남겨진 신발들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 끔찍한 현장을 더욱 실감나게 이야기하였다. 목격자의 글을 그대로 싣거나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진술을 드러냄으로서 당시의 참담한 사건이 실제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잔혹한 현장이었음을 나타내었다.
그들의 말은 타자기의 활자체 글씨처럼 단문이 되어 요섭의 현재와 과거를 찍으면서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미군이라고 고쳐서 말했지만 당시에 미군은 주둔하지 않고 북쪽을 향하여 차를 타고 재빨리 지나갔을 뿐이다. 군대가 오기 직전과 뒤의 사십오일 동안 후방 병력의 대부분은 치안대와 청년단이었던 것을 요섭을 자신의 형 요한과 함께 잘 알고 있었다. (『손님』, 108쪽)

 

  사실 류요한 목사는 신천사건과 ‘학살 박물관’이 미군이 저지른 만행의 산물이 아님을 알고 있다. 6․25전쟁 때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자 전선에서 훨씬 후방에 위치한 신천에서 기독교세력을 비롯한 이념을 달리하는 동족과 동향인들이 서로 살육을 벌였는데 이것이 신천 대학살의 숨겨진 원인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죽은 요섭의 형인 류요한과 같은 마을에 살던 순남이 아저씨가 혼으로 다시 나타나 서로 이야기하는 내용을 각각 서술한 부분이다. 지주의 아들이자 기독교 신자인 류요한으로 대표되는 청년단과 가진 것 없이 떠돌며 일하다가 동네로 돌아온 순남 아저씨가 속한 치안대가 마을에서 서로 대립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땅을 가진 지주였고, 맑스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고용살이를 하거나, 떠돌던 사람들, 소작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사회의 계급적 갈등도 엿볼 수 있다.

  학살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그들의 대립을 혼, 즉 ‘헛것’들이 이야기해주는 방식을 취하며, 당시 상황을 함께 겪은 양측의 말을 들어봄으로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헛것’의 대화는 신천 학살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생생하게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3. 현재 -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현대사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큰 줄기는 ‘좌․우 이념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문제를 황석영의 『손님』에서 주되게 그려지고 있고 작가는 그 배경으로 한국전쟁을 설정하였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은 ‘막스주의’와 ‘기독교’라는 손님을 각각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갈등의 극단으로 비참한 전쟁을 맞닿드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손님 간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아직도 남북 분단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분단 이후 50년을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살아온, 그 속에서 만들어진 현재 우리의 모습을
『손님』에서 찾아보는 작업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 ‘대내림 -살아남은 자’ 부분에서 주인공 요섭은 ‘신천 박물관’을 방문하게 된다. 그 곳에서 작가는 “지난 조국해방전쟁 시기 미제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인류 력사 상 일찍이 그 류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대규모적인 인간살륙 만행을 감행함으로써 이십세기 식인종으로서의 야수적 본능을 만천하에.......”로 시작되는 해설원의 설명과 당시 참극을 목격했다는 목격자의 기획된 호소를 통해서 현재 살아남은 자들에게 두 손님이 어떻게 대내림되고 있는지를 실제로 확인하게 해준다. 즉, 두 손님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그래도 우리에게 대내림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대내림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손님』을 읽는 것에 있어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헛것’들이 등장하여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손님』의 주된 내용이라 볼 수 있지만, 결국 현재 우리 모습이 그러한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우리의 현재 우리의 모습 또한 불안정하다.

 

4. 미래 -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손님’은 ‘주인’된 입장에서 맞아들여야 함이 당연하다. 작가가 ‘손님’으로 규정하고 있는 밖으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우리는 주체적이지 못했고, 결국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이 되어 주인 노릇을 제대로 못해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한 민족이었던 우리가 둘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씻지 못할 아픈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두 이데올로기를 민족의 현실에 맞게 받아들지 못했던 미숙함과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던 것의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자, 이젠 돼서. 그만들 가자우.
순남이 아저씨의 헛것이 말했고 일랑이도 그 옆을 따른다.
그래, 가자우.
다른 남녀 헛것들도 벽에서 스르르 일어나 바람에 너울대는 헝겊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득하게 먼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루 죽이구 죽언 것덜 세상 떠나문 다 모이게 돼 이서.
요한이 아우에게 말했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

- (『손님』, 250쪽)

 

  작가는 ‘손님굿’이라는 형식을 빌려 ‘손님’을 쫓아냄으로서 작품 속에서 시원하고 그럴싸하게 양자를 화해시키고 있다. 그러나 『손님』에서 나타나는 화해가 과연 진정한 화해일까? 진정한 화해란 갈등의 근본을 찾고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화해를 통해서는 반드시 실제 상황, 현실의 변화가 생기기 마련인데 『손님』에서 보여지는 ‘헛것’들끼리의 화해는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세월이 지났으니 잊어버리자는 ‘덮어둠’의 차원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 화해했다고 해서 과연 무엇이 달라지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리얼리즘의 작가 황석영이라면,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안을 작품에서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손님』에서 결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화해는 엄밀히 말해 ‘헛것’들끼리의 화해, 즉 ‘과거’의 화해일 뿐 ‘현재’의 화해는 아니다. ‘헛것’들끼리의 화해는 실제 지금의 현실과 연결될 수 없다. 미국에 살고있는 요한의 아들 삼열과 빌립 형제, 북한에 남아있는 요한의 아들 단열, 이들이 바로 현재를 사는 우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러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은 작품에서 보여지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화해하는 것이야말로 ‘덮어둠’의 수준을 넘어선 현실에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진정한, 미래지향적인 화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민족의 아픔과 그 날의 역사를 더 자세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 사건의 바탕이 되었던 기독교와 외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류요섭 목사의 외삼촌은 과거를 회상하며 당시에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너무 성급하여 서로에게 마음을 닫았다고 했다.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을 그때는 양쪽 다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성급하게 상대를 판단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가 될 수 없다.

  물론 작품 가운데에서 나온 ‘굿’이라는 형식이 미래 지향적이지는 않지만, 독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태도를 헛것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숨겨진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