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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소설 다시 읽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by noobim 2020. 8. 20.

*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을 읽고

 

 

1. 들어가며 – 작가 이해와 문학세계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반영한다. 이 작품을 쓴 작가 조세희 또한 자기 삶의 장면 중 쉬이 지나칠 수 없는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궁금증을 버리지 못하다가 문득 구광본과의 대담에서 ‘유년의 왕국’으로 명명한 그의 유년 시절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하 『난쏘공』)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세계의 감탄도 점점 줄어들고, 그러면서 유년의 왕국이 찬란한 빛을 잃기 시작하는 것은 언제쯤일까? 뛰어놀던 냇가와 들판에서 약육강식의 원칙을 발견하는 것과 겹치지 않을까?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어느 해 눈이 많이 온 겨울로 따라가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폭설이 내린 산과 들, 호랑이를 만나던, 귀신 이야기에 넋을 놓던 아이들은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산짐승들이 왜 예전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하나 궁금해한다. 눈이 왔을 때, 산짐승들이 불리했던 것은 참나무 몽둥이나 막대 끝에 쇠붙이를 단 연장을 갖고 있지 않은 때문이었다……. (중략).............. (조세희의 말) 전쟁이 나고부터 사냥은 질을 달리해요. 쫓아가서 한 마리씩 잡고 하는 식이 아니라, 약을 뿌려 꿩이며 참새를 한꺼번에 싹 쓸어버리게 되었던 거죠. 총을 쏘기도 하고, 수류탄을 물에 던져 넣어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내 몸엔 지금 열일곱 개의 상처가 있는데, 그 상처의 대부분이 전쟁 때 생긴 거예요.’

 

  어린 시절 전쟁을 겪고 서울로 올라온 그가 본 것은 폐허였다.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폐허를 성급하게 해결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사람들은 예전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각자의 길로 양분되어 갔다. 강하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도시 가운데로,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변두리 빈민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다가 폐허가 줄어든 도시의 모습 속에서 소년이었던 그가 얻은 결론은 이 나라 심장부에서 하는 모든 일의 기초는 부정과 부패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전과는 다른 불행감과 고독을 알게 되었고 전쟁을 통한 ‘머가니’에서의 수업을 시작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추구한다. 그러한 생각 위에 6.25 전쟁,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등 민족의 수많은 비극 앞에 매번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 번도 ‘역사에의 각성’을 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의 상황을 조세희는 고뇌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 성장을 도모하던 정부의 모습을 통해 그는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현실에 마주한 그는 『난쏘공』을 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30년 전 나는 취재를 하기 위해 서울의 한 철거촌에 갔습니다. 어느 세입자 가정의 마지막 식사 자리 목이 메인 가장은 밥을 잘 넘기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식사 자리를 지켜주기에는 벽은 너무 얇았습니다. 뚫려버린 담벼락 밑에서 나는 철거반원들에 맞선 주민들 속에 섞였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다니던 잡지사 부근의 문방구에 들러 볼펜 한 자루와 작은 공책 한 권을 샀습니다. 그것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전처럼 누군가와 함께 눈물 흘릴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이러한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악조건 속에서도 소설 쓰기에 전력을 다하였고, 민족의 비극을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을 되새기면서 작품들을 써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소외된 계층에 관한 관심과 사랑으로 표현된 『난쏘공』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2. 작가의 의도

 

  197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근대화를 지향했고, 당시의 정권은 산업화·공업화가 근대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확신했다. 노동의 환경은 저하되고, 대립적 계층 구조는 양분화되어 가고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현실 인식을 적절한 장치들의 배치를 통해 사회 모순의 고발과 그 대안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1) 양분화된 사회 문제의 고발

 

  『난쏘공』 속 인물을 계층별로 분류하자면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난장이 가족과 같은 부류인 최하층 빈민이다. 둘째는 「칼날」, 「육교 위에서」의 주인공이자 초점화자인 신애와 같은 각성한 중간층이다. 셋째는 「우주 여행」, 「궤도 회전」 , 「기계 도시」의 주인공이자 초점 화자인 윤호와 같은 부류의 상류층 아이들이다. 넷째는 경애, 경훈 등이 포함되어 있는 은강그룹 회장의 가족이다. 셋째 부류와 넷째 부류는 한 데 묶을 수도 있으나 그들 사이의 서열에 의하여 따로 개별적인 부류가 된다.

 

  이처럼 은강 공장으로 대두되는 거대 자본의 채워지지 않는 욕심 속에서 모든 영양분을 빼앗기고 쪼그라들고 쫓겨나고 하염없이 작아지는 최하층민인 난장이의 생활상은 선진 산업 자본의 막강한 돈과 권력 앞에 당면해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였던 것이다. 즉, 난장이는 70년대 한국 사회와 경제의 생산과 소비 및 분배 구조에서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계층을 표상하는 전형적 인물에 답한다 하겠다. 마침내 산업 사회의 징후가 본격화되던 당대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적 토대와 세계의 타락상으로 인해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정의된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일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을 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난장이 일가가 쫓겨난 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잘못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최하층민의 출현이 사회의 무책임에서부터 기인함을 작가는 고발하고 있다.

 

2) 연대를 위한 장치

 

  조세희에게 세계(=우주)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는, 즉 적대적 대립이 해체되는 공간인데, 70년대 후반의 한국 현실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조세희는 대립의 소멸을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이라는 개념을 문학으로 가져왔다.

  이와 같이 작가는 곡면과 내부가 따로 없는 입체적 이미지를 통해 이 사회가 양극단의 분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존의 세계인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유기적 관점으로서의 사회적 연대를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양극단의 사회 문제에 고발에 그치지 않고 그것의 해결점을 대립적 세계의 극복과 공동체의 회복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3) 계몽의 장치들

 

(1) 지식 : 올바른 판단을 위한 ‘수학교사’의 가르침

 

  『난쏘공』 연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수학교사이다. 수학교사는 『난쏘공』 연작을 시작하고 끝맺는 역할을 하며, 굴뚝 청소부와 ‘꼽추와 앉은뱅이’ 이야기를 통해 입시 교실의 안과 밖을 연결하여 내부와 외부로 구별되는 지구를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우주로 통합하려고 하는 교육자이다. 다시 말해 「뫼비우스의 띠」와 「에필로그」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화자들의 단절된 세계를 연속성을 지닌 전체로 파악하게 해준다. 두 단편에서 수학교사는 ‘마지막 수업’ 시간에 ‘입학시험과 상관없는 이야기’, 즉 굴뚝 청소와 꼽추와 앉은뱅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수업을 듣는 학생 혹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지식의 틀을 가지도록 하여 올바른 판단의 지점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러한 수학교사의 가르침은 기존 사회에 존재했던 도구화된 이성에 대한 모습을 비판하고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계몽적 장치가 된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조세희, 「에필로그」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지성사, 1998, 276면.

 

작가는 타자를 배려하지 않고 경제적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간사한 지식에 대해 경고하며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학교사는 꼽추와 앉은뱅이, 난장이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이끄는 안내자가 된다.

이러한 작가의 희망은 입시 위주의 교육만 받다가 지섭을 통해 난장이 일가를 만나면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깨닫고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이해하려는「우주 여행」의 재수생 윤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2) 행동 : 로버트 고다드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의미

 

  「난쏘공」의 난장이는 혀가 말려서 정확한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들들에게만은 대화를 시도한다. 특별히 둘째 아들 영호에게 자신이 읽던 책에 삽입된 ‘로버트 고다드’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책의 사진을 잘 보라’라고 하는 장면과 지섭이 사나이와 주먹다짐을 할 때, 아들들이 나서는 것을 막으며 ‘아는 사람이 말하도록 하라’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대화들은 로버트와 프란시스의 명언에 대한 선지식이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먼저 전자는 ‘불가능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어렵다. 어제의 꿈은 오늘의 희망이며 내일의 현실이다’라고 말했으며 후자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작가는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독자들이 죽은 지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지식으로 힘을 넓혀가서 비록 현재의 삶이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희망을 바라며 내일을 만들어가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진보한다.

 

그가 말했다.
“네 잘못을 이제 알아야 돼.”
“그게 어떤 일이죠”
“어떤 일이든, 무지가 도움을 준 적은 없어.”
화가 난 목소리로 그가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었다.
“형이 알다시피 전 많이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중략).....................
“네가 안 해도 할 사람이 있는 일을 네가 하는 이유는 뭐냐?”
“제가 할 일은 뭐예요?”
“현장을 지키는 일야.”
“제가 일하는 곳이 현장야요.”
“그럼 그곳을 뜨지 말고 지켜. 그곳에서 생각하고, 그곳에서 행동해, 근로자로서 사용자와 부딪치는 그 지점에 네가 있으라구.”

조세희, 「클라인 씨 병」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문학과지성사, 1998, 222면.

 

「클라인 씨 병」에서의 지섭은 영호의 ‘무지’를 크게 책망하게 되는데 지식의 효용성은 생각과 지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현장을 지키는 일’ 즉, 자신의 ‘지점’에서 ‘행동’하는 일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다.

 

3) 사랑 : 새로운 역사를 이끄는 힘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랑에 대한 염원이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 급변하는 산업화 속에서 긍정적인 방향의 제시로 사랑을 택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문학과지성사, 1998, 88면.

 

  위 인용구에서 사랑이 없는 땅은 마치 죽은 땅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조금은 추상적일 수도 있으나, 갈등 해결의 근본은 그 바탕에 사랑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도 역시 사랑이 전제된 세상을 작가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영수의 말에 의하면 난장이는 다음과 같은 세상을 희망하였다.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버리고, 바람도 막아버리고 전깃줄도 잘라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위의 책, 203면.

 

  작품 속에서 난장이의 죽음은 빈민 계층의 패배로 끝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오히려 난장이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검은 쇠공이 몸 밖으로 솟아올라 지구 밖으로 상승되는 구원의 손길을 맞보게 되는 동시에 이야기의 화자가 난장이에서 난장이 아들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이는 그의 죽음이 다음 세대의 새로운 각성의 출발이라는 의미로 큰아들 영수와 또 다른 화자들에게 전이되어 다음세대의 역사를 이끄는 힘으로 주제를 부각시킨다.

 

5. 결론

 

  적지 않은 수의 비평가들에게 있어서 조세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문학의 예술적 측면과 현실 비판적 측면을 높은 수준에서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 모범적 사례로 간주하였으며, 동시에 1970년대 말의 우리 현실에 대한 가장 뜻 있는 문학적 옹전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한, 리얼리즘 문학 안에서 충돌하기 쉬운 객관성과 서정성을 작가의 세밀한 기법과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것이 그 당시 소설들과는 차별성을 두는 점이다.

  70년대 사회적 문제로 이농 현상이나 인간 소외 현상을 주제로 하여 쓴 소설들은 이미 문단의 이슈로 부각 되고 있었지만, 노동문제와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단의 현실을 인식하여 화두를 던진 것은 조세희가 처음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이 제시한 이상적인 세계관을 작품에서만 가두지 않고, 현장에서 저항의 소리를 외치는 자들과 함께 연대하고 호흡하는 모습으로 문학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점을 바라볼 때 조세희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작품과 현실의 세계를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로 인식하고 있으며, 어떠한 기법과 문학적 장치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작품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여 더 큰 띠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한계로 제시하고 싶은 점은 바로 현장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작가 조세희가 직접 그 사회 문제를 목격하고 문학적으로 창작한 것에 큰 이견은 없으나 그것의 해결점을 형이상학적인 ‘사랑’이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랑을 향한 지향점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문학적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는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제안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완성할 수 없다는 데 또 다른 절망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소설의 리얼리즘을 위하여 기법뿐 아니라, 현실감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을까?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와 「클라인씨의 병」에서 보면, 난장이 아버지에게서 위임받은 유토피아를 현실적으로 이루는 것이 영수에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불균형한 힘의 분배로 짜여진 상황과 사용자에게 치우쳐 있는 힘의 분배는 근로자의 요구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짚어낸 이러한 대립 구도의 상황은 오히려 그것이 너무나도 정확한 인식이기에 단순한 ‘사랑’의 관념으로는 극복이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이 책이 읽히고 있다는 것은 40년 전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변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제시한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특성을 가지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향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지 플로이드의 동생인 플로니스 플로이드가 평화 시위에 협조를 요청하는 모습

 

  이것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은 얼마 전 큰 이슈가 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이었다. 인종 차별로 빚어진 그 사건으로 많은 흑인들이 거리에 나왔고 그것은 폭력적인 시위로 이어져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그때, 그는 형의 추도식에서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였다.

 

왼손에 평화를! 오른손에는 정의를! 오직 이것으로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편을 가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폭력을 멈추고 투표를 합시다.
우리가 다수이니까요!

 

  작품 속 등장인물인 영희도 폭력적 시위의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난장이를 억압하는 사람들을 죽여버리자’라고 큰 오빠 영수에게 당부한다. 하지만 폭력은 그 힘이 넘치면 자멸하는 힘을 가진다. 그렇기에 작가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부조리한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요소가 될 수는 없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서 영수가 택한 방법처럼, 조지 플로이드의 동생의 발언처럼, 사람들과 연대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며 그러한 지점에서 사회 정의는 실현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힘든 현실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사랑으로 택할 것을 제안하고 그것이 확장되어 ‘아름다운 인격’ (미나리아재비꽃의 꽃말)으로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아름다운 인격’ (미나리아재비꽃의 꽃말)

 

 

 

 

 

 

<<참고 문헌>>

 

1. 기본 자료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문학과지성사, 1998.

 

2. 단행본

권영민, 『소설과 운명의 언어』 , 현대소설사, 1992.

박경리, 『나의 문학 이야기』 , 문학동네, 2010.

 

3. 연구 논문

김지영, 「조세희 소설의 서사 기법 연구」 ,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박근예, 「계몽과 전쟁 사이-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우리문학회』 41, 2014.1.

박영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인칭 변화에 관한 연구」 , 『현대소설연구』 41, 2009.08.

신은영, 「조세희 소설의 환상성 연구」 ,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석사학위논문, 2003.

이춘우, 「조세희 소설 연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중심으로」 ,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주   인, 「조세희 소설의 현실 인식 연구」 ,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최주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구」 ,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4. 대담 자료

구광본, 「조세희 특집:<난장이>에서 <시간여행>까지 문학적 연대기:유년과 역사에로의 여행」 , 『작가세계』 , 1990.

 

5. 인터넷 자료

지식채널e, 『부끄러운 기록』 , EBS, 2006년 5월 8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