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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소설 다시 읽기

염상섭의 「만세전」

by noobim 2020. 8. 20.

* ‘영웅담'보다는 나은 결말 - 염상섭 「만세전」을 읽고 

 

 

1. 줄거리 요약

 

  조선에 ‘3.1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중인 ‘나’ (이인화)는 기말시험 중도에 아내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급작스레 귀국하게 된다. 경역에서는 여급 정자와 이별을 하고 고베에서는 을라 라는 여자 친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날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면서부터 검색을 당하고 감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수모를 겪으면서 대사회적인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스물 두셋의 책상도련님인 이인화는 탁상공론이 아닌 실인생·실사회의 이면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이인화는 부산의 거리 구경을 나섰다가 식민지 도시의 일제에 의한 경제적 침탈, 조선인의 몰락과 이주를 목격한다. 이러한 상황은 김천의 보통학교 훈도인 형님과 주변 인물들의 몰락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또한, 서울까지 가는 기차와 대전역에서 만난 군상들의 찌든 모습 속에서, 서울에서는 정치열과 명예욕에 들뜬 아버지와 이를 부추기는 김의관, 종손으로 무위도식하는 종형 등을 통하여 차례로 발견된다. 가족제도로 대표되는 봉건적 윤리 의식, 권력에 대한 열망과 굴종으로 나타나는 관료전제적 사고가 식민지 사회의 비리와 어울려 빚는 비극을 ‘무덤’으로 인식하면서 자전적인 성찰의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아내가 죽자 냉연한 자신에게 가책하며 초상을 치른다. 그리고 아들 중기를 형님에게 맡긴 뒤, 정자에게는 마음을 정리하는 편지를 보내고 학업을 위하여 동경으로 떠난다.

 

2. ‘타의적 여로’를 통해 발견하는 조선의 상황

 

위의 줄거리에서 보듯 「만세전」의 이야기는 주인공 ‘이인화’가 동경에서 경성으로 귀환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부분에서 ‘그러나 일전에 온 편지의 말대로 위독하다는 말은 없고, 어서 나오라는 명령과 전보환을 보낸다는 통지뿐인 것을 보면,’ 이라는 문장에서 ‘나’는 나오라는 명령을 받고 귀국을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강제로 귀국하게 되는데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한 여로에 따라 주변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다양한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자연스럽게 민족적 의식이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처음의 이인화가 동경에서 출발할 때에는 민족문제, 정치적 문제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고 무슨 일이건 소극적이게 행동했었다.

 

  그러나 그가 전보를 받고 자의가 아닌 타의적 귀국을 함으로써 점점 적극적인 사고를 갖는 내면적 성숙을 이룩함으로써 당시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인화의 내면은 우울함과 고독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는 식민지 청년의 비애에서 오는 내면적 울분이었고, 이런 모습을 통해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인화가 시모노세키에서부터 부산에 오는 중간 부분에서는 이인화가 민족문제나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드러난다. 일본인들의 계속되는 감시와 천시하는 태도, 연락선 목욕탕에서는 조선인들을 요보로 부르며 일본 각지의 공장노동자로 팔아먹는 일본인의 이야기를 듣고, 부산에서는 황폐해진 조선의 현실을 보게 된다. 일제의 억압 현실 속에 놓여 위축된 조선인들의 구체적 생활상을 목격하고 경제적 착취로 인한 곤궁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또 부산에서 일본인들 중에서 국숫집 여급들에게 무시당하는 사건 등을 통해 이인화는 지식인으로서 민족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모습에 여러 번 회의를 느낀다.

 

  따라서 이런 의식의 확대가 일어나는 여로에서 ‘길’은 피지배지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차 길에서도 그 현실을 엿볼 수 있다. 기차는 근대적 산물의 대표적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산에서 경성으로 기차가 가는 길은 문명의 길이라고 내세워지지만, 착취의 길이며 민족을 권력이나 폭력으로부터 꼼짝 못 하게 하는 길인 것이다.

 

3. 「만세전」에서 나타난 ‘죽음’의 의미

 

소설에서 ‘묘지’나 ‘무덤’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단락들이 자주 나타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의미 또한 생각해보았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 봐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공동묘지 속에서 사니까 죽어서나 시원스런 데 가서 파묻히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하여간에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다. 그 속에서도 진화론적 모든 조건은 한 초 동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겠지! … 

 

  「만세전」에서는 ‘무덤-죽음’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삶보다 죽음을 선행하게 한다. 염상섭이 조선의 모습을 무덤으로 비유한 것은 냉정한 관찰과 소극적 비판에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한다면, 타자의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현존재(자기)에게 기존 문제를 반성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와 더불어 당시 조선인들의 피동적인 삶의 상태는 곧 죽음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죽음 그 자체가 피지배계층들의 존재 가능성의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인식과 함께 이러한 상황이 조선인들에게 있어서는 ‘폭력’과 같은 것이지만, 조선인들에게 발생하지 않아야 할 상황을 통해 탈식민화를 격발시킬 수 있음을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이인화는 조선을 묘지라고 표현하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탈출의 의지를 보인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이인화의 절망감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직접 조선을 와서 현실을 보니 동경에서 이인화가 생각하고 추구하던 개인들의 삶이 보장되는 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공동묘지처럼 일제의 억압과 폭력에 의해 획일된 삶과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생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죽음과도 가까운 조선인들의 생활을 보고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민족의식의 전환을 가지며 조선인들의 소극적 삶에 대한 비판밖에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라는 표현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작품에 표면적으로 이런 의지가 나타나면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현실의 반영으로 인해 3·1 운동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보여준 방법이기도 하다.

 

4.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

 

  처음에는 이인화의 동경 도피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한 것이라 느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볼 때, 만약 이인화가 죽음과 같은 조선의 상황에 맞서 애국지사가 된다든지, 정의의 사도가 된다고 한다면 이 소설은 허무맹랑한 것이 될 것이며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소설이 될 것 같다.

 

  이인화의 태도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평가해 보자면, 하나는 고뇌조차 하지 않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그 시대에 현실에 맞추어 ‘숨 죽이며 사는 지식인들의 보통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러한 결말이 당시를 살아갔던 유학생들의 정서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이인화는 이와 더불어 그의 동경 도피의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듯이, 이인화는 방관자의 입장이긴 하나, 봉건주의적 태도에만 집중하고 근대적인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질려서 다시 동경으로 도피한 것이며, 애국심이 없어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이는 한계점이 아닌 민족의식에 대한 각성이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이를 촉구하는 결말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결말이 소위 영웅담보다는 나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