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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참된 지혜 (욥기 42장 1절~6절)

by noobim 2022. 1. 6.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정읍제일교회 성도님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력에 많은 절기가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대림절기를 가장 사랑합니다. 이 절기 가운데 읽는 성경은 욥기서입니다. 고난 가운데에서도 참된 지혜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욥의 모습이 꼭 우리네 사는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에도 이 욥기서를 한번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측면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합니다. 욥기를 통해 어떤 지혜로 대림절을 지나내야 하는 것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욥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인데요. 욥기 1장 1절이 그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1)

 

  욥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욥이 살던 우스 땅이 어디에 있는지, 욥이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또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지혜서들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욥이 청동기 사람인지, 철기 사람인지 욥이 살던 곳이 메소포타미아인지 가나안 땅인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욥기서가 모세 시절에 쓰였든 어느 시절에 쓰였든 이러한 것은 욥기가 던지는 질문과 대답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욥기의 맨 처음에 욥이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가가 핵심입니다. 욥기 1장 1절은 그를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욥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이 네가지 표현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욥은 하나님 앞에 흐뜨러짐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욥기에서는 이러한 욥의 상태를 1장과 2장에서 세 번 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렇게 의로운 자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받을 수 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흔히 목사님들께서는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 의롭게 살면 하나님께서 은혜 내려주시고 복을 주신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살펴보면 우리의 삶이 마냥 그렇기만 한가요? 아니지요. 욥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지혜의 종류에 대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규범적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잠언서와 전도서와 같은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행하면 복을 받는다와 같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반성적 지혜입니다. 이것은 까닭 없는 고난 앞에도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잠언에서 말하는 규범적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하지만,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무지의 자각에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1:1~5절에서 설명하는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가 받은 자녀와 재물의 복은 규범적 지혜를 온전히 구현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상입니다. 잠언서 22장 4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이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겠는데요. 영화를 볼 때 감독이 재미있게 하려면 영화의 구성에 반전을 심어놔야 그 영화가 재미있겠죠? 이걸 쉬운 말로 밑밥을 깐다고 합니다. 이 욥기서에도 반성적 지혜의 스토리 라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욥이 철저히 의로운 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성적 지혜는 반드시 그 서두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규범적 지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행했다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욥기의 서두에서 그가 의로운 자라는 사실을 반복하는 이유는 욥이 앞으로 당하는 고난에 욥의 책임이 전무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고난을 받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의로움보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욥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펼쳐주세요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데 저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고 해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니 확실한 응답이 왔습니다. 머라고 하셨을까요?

 

그럴거면 니가 하나님 해라.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어떠한 한정적인 박스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며 한낱 진흙 알갱이에 불과한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예측하거나 주문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욥기 안에서의 참된 지혜는 뿌린대로 거둔다 라는 식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이러한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나의 고집과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든 움켜지려고만 하지요. 나의 고집과 나의 의, 내 뜻과 의지로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면 그럴수록 움켜지면 질수록 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줄줄줄 새듯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일은 세상에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신앙 생활하는 것이 신바람 나는 일이라고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경제적인 여건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예요. 그렇다고 모두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쯤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면 생각이 조금 바뀌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흔히 은혜받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들 하시지요? 하나님 은혜가 무엇인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수도 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배신해도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예레미야 32장 38절~40절 봉독해 드립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공짜 사랑이자 “까닭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다시 질문드립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시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 해도 우리는 ”까닭 없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욥기 초반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내가 욥과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악에서 떠난 자를 세상에서 본적이 없어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무어라 이야기합니까? 하나님 어찌 그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라고 생각하시나요?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물을 땅 가운데 넘치게 했으니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겠지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 하나님과 사탄이 두 번째로 만나는 장면도 마찬가지예요. 이번에는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라고 사탄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건강을 뺏어도 그가 하나님 욕 안할까요? 라고 말합니다.

 

  욥기에서 살펴보면, ”까닭 없는 신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탄의 신학이고,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욥의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주시거나 거두시거나 하는 일은 온전히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까닭 없는 고난을 대면할 때 이러한 상황을 다른 것에 전가 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만을 생각하며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를 테면 고난이 닥칠 때 아! 내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갔구나. 마귀가 나를 넘어지게 했다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지요? 그러나 아까 보았듯이 사탄이 고난을 내리던가요? 사족이긴 하지만 저는 욥기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나오는 장면을 고난 결재 장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난을 주는 것이 결코 사단의 일이 아니예요. 고난도 시험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니 사탄도 하나님한테 결재를 맡아야 합니다.

 

  사탄 뿐만 아니라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보고 저 고난이 어디서 온 것인지 또한 욥의 고난을 변호하려 합니다. 하지만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까닭 없이“ 주셨습니다. 고난의 이유에 대해 하나님 본인마저도 가타부타 말씀하지 계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도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으시는데 욥의 친구들이 나서서 설명하고 있는 꼴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볼 때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니들이 하나님 해라. 라고 하실테지요. 욥의 친구들은 욥을 채근하며 그 고난을 이해하듯 설명하려고 하는 소위 잘난 척을 하며 욥 앞에 서 있지만, 하나님 눈에는 친구들은 우매한 자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질문드립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까닭이 없이도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을 신뢰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일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일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규범적 지혜로, 인과응보의 원리로 욥을 단죄하여 하나님의 눈에 우매한 자가 되지만,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여 고난을 견딤으로 지혜자가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고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신뢰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그 까닭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그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오늘 본문 42장 1절~6절인 것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대림절에 욥기를 읽는 것일까요? 우리가 대림절에 누굴 기다리죠? 바로 예수님을 기다리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까닭 없이 고난받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규범적 지혜로서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철저히 실패하신 분입니다. 그런 것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이 땅에서 호위호식을 누리시면서 사셨어야 해요. 소위 세상이 말하는 복을 누리시면서 사셨어야 합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이 시키는 일에 다 순종하셨으니까요.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고 제자들을 세우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두루 말씀 전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머리 뉘일 곳 없이 다니시다가 그렇게 까닭없이 처참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도 ‘주님, 나 이거 했으니 이거 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끝까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신뢰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보상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분을 우리는 이 대림절기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렸을 때, 읽었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다시 한번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 ‘크리스챤’인데 그 등에는 벗을 수 없는 짐이 한 가득 메어져 있습니다. 그는 '멸망의 성'에서 출발하여 '낙담의 늪', '사망의 골짜기', '허영의 거리'를 지나 마침내 '천성'(天城)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순례자의 구원 과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부분인 죽음의 강을 통과하는 장면인데요. 이 강을 통과해야만 천성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강의 깊이 너무 깊고 주인공 크리스챤은 살기 위해 짐을 벗기를 원했는데 이 강물에 뛰어들면 죽을 것 같다는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챤과 동행하는 소망 씨는 그 두려움과 공포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크리스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뒤로하고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몸을 내던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그 결과는 죽을 줄 알았던 인생이 마침내 건짐을 받아 천성에 당도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크리스챤의 모든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지혜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고난과 고통이 내 앞에 닥쳐올 때, 나 자신의 생각과 의를 내세워 무엇인가를 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람을 잡으려는 짓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참된 지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까닭 없는 고난이 닥쳐와도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곳에 내 영혼을 내던지는 일입니다. 내 뜻과 의지로 무엇인가를 해보는 것과 어떠한 이유를 찾아 나서는 일처럼 우매한 것은 없습니다.

 

  바라건데 오늘 말씀의 욥처럼, 천로역정의 ‘크리스챤’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까닭 없는 고난에 기꺼이 대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지혜로 예수님을 기다리시는 대림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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