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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by noobim 2021. 10. 16.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에스겔 3:1~15)

 

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12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리시는데 내가 내 뒤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찬송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니

13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생물 곁의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14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15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할렐루야!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 전에 나온 여러분들이 다름 아닌 사명자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목회자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닌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명자입니다.

 

오늘 전할 말씀은 에스겔서 3장의 말씀인데요.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장은 에스겔의 소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사명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의 소임을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해하기 쉽게 3단어로 축약해서 오늘 말씀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첫째, 1절에 먹으라! 둘째, 3절의 채우라! 마지막 세 번째, 4절의 고하라!입니다.

 

첫 번째 사명자는 무엇을 먹어야합니까? 네 맞습니다. 두루마리를 먹어야 합니다. 이 두리마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먹으라 하신 말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요?

 

함께 에스겔서 2장 10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겔 2: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현재 이스라엘 상황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있는 상황이라 축복의 말을 주어도 모자란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바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앞뒤로 빼곡하게 적혀져 있는 것을 보면, 단순한 말이 아닌 것이지요.

 

  우리 옛말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다면, 이 말씀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리진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반면에 이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쓴 것은 모두 다 약이다.’라는 말 말입니다.

 

잠시 에스겔을 뒤로하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말씀을 전한 사명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공생애를 보내셨지요.

 

누군가가 저에게 왜 예수님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아요. 예수님은 참 신이시기도 하지만 참 사람이기에 좋다고 말입니다. 성경을 읽게 되면 그 자간과 행간 사이에 예수님의 참 인간 됨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유약함을 아셔서 체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측은히 헤아리실 때를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들을 좋아하셨습니다.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정이 들었던 사람들도 분명 있으셨을 것입니다. 무리가 홀로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아갈 때,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셨을 때도 있으셨겠지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좋은 사람들과 항상 같이 있고 싶은 마음 분명 있지 않으십니까? 정든 사람들과 오랫동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뒤로 하시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자들, 즉,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를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을 위하여,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게 됩니다.

 

이것은 왜 그렇습니까?

 

누가복음 22:42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께서도 분명 인간적으로 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낯익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머무는 것, 그들과 함께하는 일에 대해서 친근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셨습니다. 이렇듯 사명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19절 말씀 봉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아멘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뜻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쓴 것을 먹이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믿고 우리는 그 입을 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 내 입을 벌려야 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명자의 소임인 것입니다.

 

더욱이 주목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먹으라 하시기 전에 에스겔에게 무엇을 먹으라 하십니까? 1절에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도 하시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의 뜻을 구하고 찾고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대면할 때, 몸을 일으켜 보석을 찾듯 하나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쓰디 쓴 말씀이어도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입을 벌려 발견한 말씀을 먹었을 때에 어떤 변화가 나타납니까? 3절 마지막에 보면 그 말씀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입을 벌려 그 말씀을 먹으니 그 말씀이 오히려 단 것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3절~26절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아멘

 

마라의 쓴 물에서도 보이듯이 쓴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치료제입니다. 그렇기에 쓴 것은 다 약이 됩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이 말씀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고치시려는 쓴 치료제인 것입니다. 알고 보면 달디 단 꿀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채우라. 이 말씀을 어디에 채워야 합니까? 3절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알라이다 아스만이라는 학자가 쓴 ‘기억의 공간’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의 내용은 인류가 발전해 오면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어떠한 매체를 써왔는지에 대한 것과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어떠한 비유나 심상을 들어 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오늘 말씀과 매치가 되는 내용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기억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사용한 매체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즘에는 우리 기억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전자매체를 쉬이 구할 수 있지요? 바로 노트북이라든지 녹음기라든지 핸드폰이라든지 이런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어떠했을까요? 고대 시대에는 이러한 매체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휘발성이 있기에 사람들이 문자로 기록해서 그것을 장기적으로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 필요했다고 해요. 예로 들어보면, 우리가 앞에 두고 있는 성경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에서야 성경책을 휴대 간편하게 볼 수 있지만 고대 시대에 이것을 보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성경은 원래 양피지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는데요. 두루마리 한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 많은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양을 도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털을 제거해야 하고요. 또 그것을 말리고 가공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을 장기적으로 그 내용을 기록하거나 보존할 수 있는 기술자를 불러와야 하지요. 이에 더해서 문자를 새길 수 있는 흑탄을 구해오는 일을 생각한다면 만만치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에스겔의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는 하찮은 행위가 아닙니다. 비록 이것이 환상 가운데 나타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두루마리를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참으로 귀한말씀을 먹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는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백록을 인용하며 기억에 대한 메타포로 위장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위장을 라틴어 ‘ruminare’(루미네르, 되새김, 반추)입니다. 이것은 성찰을 뜻하기도 하고, 되새김질을 말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소나 양이 음식을 저장했다가 다시 끄집어내어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되씹어 맛보고 그 깊고 충만한 의미를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마치, 이것은 음식을 잘게 씹어 그 맛을 즐기고 그 음식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두루마리를 ‘창자와 배에 채우라’는 것은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오랫동안 되새겨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말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위장이라는 것은 음식물을 저장하거나 머물게 하는 곳이 아니고 통과시키는 장소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통과시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음식의 영양분이 내 안에 소화되어 뼈와 살을 이루게 됩니다. 말씀이 운동력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에 창자와 배에 채우라는 의미를 더욱 확장시키게 되면, 그 말씀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체화되는 일을 말합니다.

 

  이러한 체화의 경험은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일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 맺음으로 연결됩니다. 이 관계 맺음을 통하여,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가치를 부여해 주고,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와 관계 맺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앞에서 나는 누구인지를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에스겔 또한 이 관계 맺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세 번째, 4절의 ‘고하라!’의 부분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라 하십니까? 바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고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누구입니까? 5절에서 9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는 에스겔과 같은 언어를 쓰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이 에스겔이 전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그 귀를 닫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듣기를 원치 않는 자처럼 귀먹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적인 둔감성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거부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라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을 부어주십니다. 그 힘은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그 힘은 하나님께서 이르는 모든 말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겔 3:10 새번역 -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모든 말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들어라.“)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이름에 걸맞게(에스겔 이름 뜻-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시리라)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에게 집중하십니다.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많은 성도님들이 사역자가 제단 위에 서서 설교를 선포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고하는 일은 입을 닫고 듣는 일이며 또한 나를 잠잠히 돌아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 깊이 그 말씀이 새겨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 첫걸음입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께서도 주위에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서 고민하고 계신 분들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게 참 무섭고 두렵게 느껴지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짓이라고 비난받을 때의 그 기분을 저는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시편 42편 10절에서도 말합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떠하신가요? 에스겔 3장 14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지 않나요? 또한 우리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3장 15절-새번역 나는 그들과 함께 이레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우리의 사명을 어떻게 행해야 할지 곤란해하지는 않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사명자에게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그를 감동시키신다(14절)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이죠.

 

  그 방법을 말씀드리기 위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책을 읽다보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집니다. 더불어 성경을 읽기에도 좋은 계절 같아요. 요즘 우리 금요일날 저녁에 교회에서 무엇을 진행하지요? 맞습니다. 성경통독을 하고 있습니다. 통독을 진행하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펜을 들어 밑줄을 치게 됩니다. 하지만 밑줄을 쳐도 끝내 잊어버려요. 집에 가서 자리에 누워서 보면 어? 그 말씀이 무엇이었더라 하고 생각이 나지않지요? 그게 왜 그렇습니까? 말씀의 두루마리를 다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체화되지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제가 좋아하는 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시인 중에 기형도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분이 쓰신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를 꼽아보라고 하면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입니다. 그 시에서 시인이 그려내는 목사님을 보게 되면 에스겔의 모습이 보여요. 목사님 외의 다른 사람들은 목이 곧고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아 보입니다. 더욱이 제가 집중하는 부분은 바로 ‘성경책이 아닌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목사님은 에스겔처럼 말씀을 먹고 묵상함으로 그것이 체화되어 그의 생활에 밑줄을 긋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초라한 시골 읍내 목사님이지만, 성도들이 그래서 어떻게 된 게 목사님이 복도 지질이없다고 수근덕거리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 목사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화시켜 자신의 생활에 밑줄을 긋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그들의 마음을 녹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잠잠히 주님의 말씀과 한 몸을 이루어 내는 일입니다. 체화된 말씀으로 내 생활에 밑줄을 긋게 된다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광장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장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명자들은 하나님의 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책 말입니다. 나 자신 스스로가 살아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하루 하루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룬 내 생활로 인해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는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책 한 권과 같은 삶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정읍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명자가 행해야 할 소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습니다. 또한 그것을 배와 창자에 저장하여 수없이 묵상합니다. 사명자는 그 말씀으로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어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다른 이에게 읽힐 만한 책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체화된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책으로 말입니다. 원하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생활에 밑줄을 그어 다른 이에게 영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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