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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벌거벗은 아이

by noobim 2022. 5. 6.

벌거벗은 아이 - 사무엘상 2:18~21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기 위하여 2부 예배에 오신 우리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무엘상 말씀 서두에는 두 가정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이 두 가정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아스 그리고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이 나오게 되는데요. 이 두 가정의 부모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마포 에봇’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먼저 사무엘상 2장 19절입니다.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네요. 봉독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여기서 작은 겉옷은 18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세마포 에봇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입니다. 2장 28절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세마포 에봇’은 무슨 옷입니까? 맞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입던 예복이예요. 이 두 가정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의복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각 가정에 닥칠 아들들의 말로는 확연히 다른 결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33절~34절까지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아스로 하여금 표징이 되게 하셔서 결국 이 두 아들들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반해 사무엘은 21절, 26절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면서 사람들에게는 은총을 받고 35절 하나님에게는 충실한 제사장으로 부르심 앞에 순종하게 됩니다.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세워지지만,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만행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저는 사무엘상에서 엘리의 아들들의 행실이 악독함을 사무엘상 기자가 서술할 때, 너무 리얼한 표현이 있어서 감당이 안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13절에 제사장의 사환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솥 가마 안에 있는 고기를 찔러보는 장면입니다.  혹시 여러분 수육 삶아보신 적 있으십니까? 수육이 담긴 냄비에 젓가락이나 포크를 가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그것을 찔러 보셨나요? 어떤 것이 잘 찔러지던가요? 그렇죠! 잘 익지 않은 것은 잘 찔러지지 않지만 잘 익은 고기는 쑤욱! 하니 잘 들어가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사환을 시켜 갈고리를 가지고 잘 익은 고기들만을 가려내 척척 꼽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이에 더하여 15절 보시면, 제사 드리려고 온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릴 기름을 먼저 태우고 그 후에 생고기를 가져가든 삶은 고기를 가져가든 하라고 했지만 지금 당장 그것을 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고 보채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좋은 것을 먼저 드려야 할 홉니와 비느아스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자신이 먼저 착복하여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고 있는 꼴이라니 세상에 이런 부랑자가 또 어디있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22절입니다. 그들은 당시 성전에 거하면서 제사를 돕는 성전 여인과 동침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여기에는 엘리 제사장의 잘못이 더하여져 집니다. 23-24절에 보시면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의 악행을 백성들에게서 듣습니다. 그러면서 들리는 소문이 안 좋아 그러지 말아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네들 때문에 죄를 짓게 되겠어 하면서 자신의 아들들 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들들의 죄악을 말리는데 적극적이지 않아요. 방임하면서 큰 죄를 엄격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엘리 제사장이 이들을 방임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이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을 피해서라도 먹고는 살고 있으니까요. 그는 아들들의 더러워진 예복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 없이 행동하는 아들들 앞에서 벙어리가 된 채로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세마포 옷을 곁에 두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 천덕꾸러기와 같은 아들들은 예복을 입고 있으나 ‘벌거벗은 아이’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들들의 눈이 어두워져 악행을 저질렀어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 죄를 돌이키도록 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더러워진 예복을 벗겨버리고 다시금 새로운 세마포 에봇을 입혀서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엘리 제사장의 행동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까? 두 아들들은 아이와 같은 신앙에 멈춰서서 생명이 끊어지게 됩니다. 또한 이는 엘리 가문의 파멸뿐만 아니라 전쟁에서의 실패, 법궤의 빼앗김이라는 민족적 비극에 다다르게 됩니다.

아들들의 생명이 사라지고, 믿음의 집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게 되는 일이 어찌 쩍쩍 걸리는 고기를 먹으면서 그나마 살고 있다는 안도감보다 좋은 일이겠습니까?

 

  이제 한나의 가정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한나는 그의 가정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정으로 세워갔습니다. 그것도 성실하게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세우게 됩니다. 한나의 안도감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아들의 서원을 위해 말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까지 동반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한나가 아들을 원한다고 111절에 기도할 때, 사람이 급하면 하나님 앞에 어떤 맹세도 할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아들만 주시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고 인간적인 생각에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얻고 나서도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합니다. 성경을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나가 이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1장 24절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께 그 아들을 올려드리게 됩니다.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가 만 2세가 될 때까지 젖을 먹으며, 때로는 3세까지 먹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2, 3세 때에 하나님께 사무엘을 바쳤다는 뜻이 됩니다. 이에 한나는 아들의 헌신을 위하여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올라가서 번제를 드리고 자신의 서원을 더욱 확고히 합니다.

 

  또 어떤 일을 행하였습니까?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제사장에게 위탁하고 나서 한나가 사무엘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일년에 단 한번 성전에 올라올 때 뿐이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손수 아들에게 세마포 에봇을 지어 갔습니다. 그 옷을 지어 올라갈 때, 아이를 보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겠습니까? 얼마나 안아주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한나는 그 사랑의 방향을 아들이 아닌 하나님께 돌립니다.

 

  생각해보면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와 마찬가지로 한나의 아들 사무엘도 벌거벗은 아이입니다. 왜냐고요? 한나가 아들을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23살짜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아직 눈이 뜨이지 않은 시기이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면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질렀다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들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아들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스스로 순종할 때까지 무엇을 합니까? 매일 밤낮으로 드리는 자신의 기도를 실 삼아 기회가 될 때마다 성실하게 세마포 에봇을 짜서 사무엘에게 새 옷을 입힙니다. 아직 하나님께 눈 뜨지 못한 벌거벗은 아이를 위해서 그것도 단 한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그 아이가 스스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말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도 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 친구들을 하나님께서 제게 영적으로 주신 아들 딸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친 아들 친 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려고 마음 먹고 기도하고 애쓰는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학부모님들 상담하다 보니까요. 이런 말씀들을 하세요. 목사님 애들 잘 부탁드려요. 아무리 해도 교회를 가지 않을려고 합니다. 교회가 재미가 없나봐요. 제가 별짓을 해도 잘 안되고요. 옛날에는 교회 잘 다녔는데요 이제는 머리가 커져서 어떻게 안돼요. 신앙 들어갈 수 있도록 꼭 좀 부탁드릴께요. 이런 말씀을 하세요. 물론 어려운 것 알아요.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네 아들 딸들도 마찬가지시겠죠. 그런데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나가 여호와께 드리되 언제까지 드리겠다고 해요? 사무엘상 1장 28절 함께 찾아보기 원해요. 그의 평생을 드리겠다고 해요. 그리고 한나는 그 고백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아들 사무엘이 한나에게 평생의 사명이었어요. 한나가 엘리 제사장에게 사무엘을 맡기고 나서 땡이 아니였어요. 한나는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녀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평생의 사명입니다. 이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내 아이 좀 교회 좀 나가게 해주세요. 말로만 기도하는 거요? 교회 좀 다니라고 잔소리하는 거요? 아니요. 그렇게 하면 더 싫어하는 거 뻔히 아시잖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입은 그리스도의 옷 그 한 터럭을 내어 벌거벗은 아이에게 날마다 기도로서 묵묵히 세마포 에봇을 지어 입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단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평생에 걸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니 쉽지 않지만, 그 힘을 하나님께 구하며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기도에 행동으로 나의 서원이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자녀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녀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작아지기 마련입니다. 무서운 호랑이도 자기 새끼 앞에서는 쩔쩔맨다고 하지요? 교회에 오셔서 이런 이야기 들으시면 마음 불편하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자녀 이야기 할 수 없잖아요 하시는 분도 있으실테죠. 하지만 여기 있는 이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저의 자녀이자 여러분의 자녀입니다.  벌거벗은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예요. 그렇기에 이 시간 함께 결단하시기 원합니다. 나의 사명으로 이 자녀를 주셨사오니 기도를 실 삼아 세마포 에봇을 만들어 입히는 일을 쉬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자녀가 하나님 앞에 살기 원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오나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자녀를 통해 하나님 영광받으시기 원합니다. 고백하면서 함께 찬양하기 원합니다.

 

  찬양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내 평생의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임을 말씀을 통해 다시금 깨닫습니다.

돌이켜 보면, 자녀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언제나 내 모습은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주님 이 시간 다시금 결단하며 나아가오니 우리 자녀를 통해 하나님 영광 받아 주옵소서. 내가 그 일을 위하여 고백하는 말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벌거벗은 아이와 같이 부끄러운 자녀로 세워지지 않게 하시고 내 평생을 다하여 기도를 실 삼아 아이에게 입힐 세마포 에봇을 성실하게 짓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통해 자녀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몸소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세상 구경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 이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삽니다 라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이 모든 말씀 우리의 아버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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