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로의 기도- 박완서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읽고
1. 줄거리 요약
어느 날, 형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화자는 증조모님의 제사를 잊어버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증조모님의 제사를 잃어버린 것이 별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서 공중전화에서 전화번호를 잊어버려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된 것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늦게 들어감으로 해서 딸들에게 긴 성화를 들어야 했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명애와 화자의 친척 조카의 결혼식에서 손도를 맞아야 했던 것을 이야기하고, 형님에게서 민가협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아들 창환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창환이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된다. 또 자신이 힘들고 괴로울 때 외우는 은하계의 주문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이미 그 효과가 다한 것이기에 화자에게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명애를 따라 아들이 다친 동창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다친 아들의 행동을 보며 자신이 더 이상 숨길 것 없이 슬퍼해도 된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형님의 눈물을 끝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2. 1인칭 시점만을 통한 서술 방식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사용하고 있다. 이 1인칭 주인공 서술은 내면적 고백이나 독백의 성격을 가짐으로, 일종의 진실을 입증하는 형식을 갖추게 된다. 그렇기에 1인칭 서술은 체험적 자아에 몰입하는 서술과 지난 일을 회상 속에서 재체험하는 서술적 자아의 서술이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두 자아 사이의 관계는 체험적 자아가 후회, 개심, 통찰을 통해 변화를 겪은 후 그의 인생을 되살려 보는 서술적 자아로 등장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며 결국에는 1인칭 주인공이 점차 자아를 이해하면서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 속에서 이른바 진실을 입증하는 형식이 획득되는 것이다.
저는 별안간 그 친구가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남의 아들이 아무리 잘나고 출세했어도 부러워한 적이 없는 제가 말예요.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형님. 날카로운 삼지창 같은 게 가슴 한가운데를 깊이 훑어내리는 것 같았어요. 너무 아프고 쓰라려 울음이 복받치더군요. 여기서 울면 안 돼. 나는 황급히 은하계 주문을 외려고 했죠. 소용이 없었어요. 은하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저는 드디어 울음이 복받치는 대로 저를 내맡겼죠. 제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참고 있었을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대성통곡, 방성대곡보다 더 큰 울음이었으니까요. 제 막혔던 울음이 터지자 그까짓 은하계쯤 검부락지처럼 떠내려가더라구요. 은하계가 무한대건 검부락지건 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일이지, 제까짓 게 인간 없이는 있으나마나 한 거 아니겠어요. 그 집에서 그러게 울어버리니까 명애도 그 친구도 기가 막힐 밖에요. 동정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나봐요. 친구는 자기를 그렇게까지 불쌍해할 것 없다고 화를 내더군요. 명애는 아니었어요. 명애는 제 속을 어느 만큼은 읽어낸 것 같았어요. 우리 사이엔 우정이라는 게 있었으니까요.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더군요. 그날말구 며칠이나 그랬어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 문학동네, 2019, 400~401면.
이러한 1인칭 시점의 유용성은 인물의 내면적 고백을 통해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을 벗고 그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자아를 찾아가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사용한 것은 수다스럽고 사소한 내용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기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증조모님의 제사를 잊어버린 이야기, 공중전화에서 집 전화번호를 잊어버린 이야기, 그로 인해 아이들에게 구박을 받은 이야기, 친구와 친척 조카의 결혼식에서 손도 받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아들의 죽음 이후의 자신의 변화, 아들의 죽음을 극복하는 이야기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기 위해 사용한 장치인 것이다.
3. 다양한 언어를 통한 소통의 방식
1) 수다
수다는 힘 있는 남성의 언어가 아닌, 주변의 언어이며, '고백'의 말하기 방식 중 하나이다. 수다는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두서없으나 이는 상처를 치유하는 기능을 가진다. 상처나 고통 자체에는 논리성이 없기에 이러한 것들의 치유도 논리적이지 않은 ‘수다'라는 자유로운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수다는 확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있어서도 확산적인 속성을 보인다. 마지막에 나타나는 형님의 눈물도 이러한 상처의 확산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도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기도란 혹은 고해성사란, 신에게 하는 혹은 자신보다 높은 존재를 향해 혼자 지껄이는 대화 혹은 수다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은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통곡의 벽'과 같이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 형님에게 하는 나의 수다는 스스로에 의한 구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성(神性)을 가지지 않은 인간인 형님은 나의 이러한 수다를 듣고 울음을 터트린다.
2) 다른 이의 목소리 흉내 내기
화자만이 등장하는 전화 통화로만 구성되는 소설은 너무 주관적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작가는 다른 이의 목소리를 모사함으로써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이 형님의 목소리를 간접 인용하는 것이다. ‘나'는 자기 수다의 늪에 빠져 극단으로 흘러갈 적마다 형님의 질책하는 목소리를 넣음으로써 소설의 객관성을 획득한다. 또한 이것은 형님 뿐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 역시 모사 되고 있다. 딸인 '창희'의 말과 '고등학교 동창'의 말은 직접 인용되고 있다.
그 회상의 상황 안에서 텍스트의 화자 '나'는 청자가 되고, 그들이 화자가 된다. 즉, '나'는 이야기를 구성해 가는 화자도 되지만, 회상의 영역 안에서는 청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나의 전화 통화로 진행되지만, 주인공 '나'의 고백과 '나'의 밖에 위치한 인물들의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중첩되고 상호 연관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여러 목소리의 등장은 객관화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하나는,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등장함으로써 지루해질 수 있는 구성에 긴장감을 이어주는 완급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등장인물 각각의 삶의 상처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3) 울음
울음도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여성적 말하기 방식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박완서 스스로도 자신의 소설을 '구수한 곡성(哭聲)'에 비유하고 있듯, 그녀의 울음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토해내는 방식이다. 이처럼, 아들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토해내는 울음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아프고 쓰라려 울음이 복받치더군요. 여기서 울면 안 돼. 나는 황급히 은하계 주문을 외려고 했죠. 소용이 없었어요. 은하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저는 드디어 울음이 복받치는 대로 저를 내맡겼죠. 제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참고 있었을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대성통곡, 방성대곡보다 더 큰 울음이었으니까요. 제 막혔던 울음이 터지자 그까짓 은하계쯤 검부락지처럼 떠내려가더라구요. 은하계가 무한대건 검부락지건 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일이지, 제까짓 게 인간 없이는 있으나마나 한 거 아니겠어요.
전 그 울음을 통해 기를 쓰고 꾸민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놓여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러고 나서 요 며칠 동안은 울고 싶을 때 우는 낙으로 살고 있죠.………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떠내려갈 거 있으면 다 떠내려가라죠, 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짓도 안 할 거구요.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위의 책, 401~402면.
4.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
누군가를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 통화에 의지하여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 가운데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해 주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한 일상적인 대화, 즉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시콜콜한 대화와 나의 몸짓을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살이가 조금 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박완서는 수다라는 카타르시스로 자신의 고통을 작품에 녹이는 것과 더불어 독자의 아픔을 치유하고 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로 독자를 다독이며 위로의 기도를 건네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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