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소개10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없애고- 이기리의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시평론 1. 들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원론적인 이야기이겠지만, 이 질문은 마지막 학기를 앞에 둔 나에게는 꽤나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다. 물론 시를 쓰는 한 평생을 따라다닐 질문이겠지만, 그걸 잘 몰라서 여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발견한 두 책이 있다. 하나는 알다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이라는 책이고 하나는 이기리 시인의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였다. 이 두 책의 연관성은 다름 아닌 기억에 관련한 트라우마 재생법에 있다. 알다이다 아스만은 그의 책의 초반에 시인의 역할과 시인이 시를 왜 써야하는지에 대해서 음유시인인 시모니데스의 일화를 빌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테살리아의 왕 스코파스의 초대로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낭송했는데 그 왕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시에 제우스의 쌍둥이.. 2022. 1. 6. 최지은,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리뷰 아픔을 안고 태어나는 계절 - 최지은,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를 읽고……. 이 시집 속 화자 가운데 중요한 이미지를 하나 꼽자면, 물의 이미지라고 말하고 싶다. 더욱이 흘러가는 물이 아닌 시집 속 (「전주」)에서처럼 웅덩이에 고인 물의 이미지이다. 그녀는 이 웅덩이 속에 자신의 비밀스러운 아픔을 저장하고 있다. 시인은 ‘젖은 그림’(「기록」)과 같은 시어들을 부유하게 하여 ‘따로 붙어 있는 다른 계절’(「전주」)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한다. 깊고 깊은 웅덩이 속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그녀의 무의식적인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작품에서는 이것을 ‘꿈’ 또는 ‘꿈속’이라고도 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필연적으로 지나온 세계에서 ‘듣고 싶은 말이 들릴 때까지 시를 쓰고’(「창.. 2021. 9. 11.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뜻 없는 단어들이 만드는 또 다른 세계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시평 나에게 있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사냥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하지만 이제니의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시집에서는 의미를 찾아 나서는 고지식한 독자의 사냥을 가로막고 서서 큰 낭패를 맛보게 한다. 처음에 이 시집을 그렇게 읽었다가 큰 수렁을 만났다. ‘이게 왜 어째서 시일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 그리고 낱말과 낱말 사이 뜻 없는 것들이 의미보다 퍼져나가는 어떠한 ‘세계’을 만들고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세계는 정형화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시인만이 단어들로 인해 힘이 생기고 표면장력처럼 무한대의 내면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2021. 8. 13.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 쓸쓸한 이방인의 노래 -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1. 들어가며 허수경의 시집을 받아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 ‘날씨가 이리 좋을 게 뭐람?’ 하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시집을 읽으며 시인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맞닿았을 때는 내 머리에만 먹구름이 생기고 어디선가 비를 맞고 서 있는 (「늙은 가수」)가 표정을 빠뜨린 채(「표정 1」)을 나타냈다. 또한 그녀는 ‘아아 오오 우우’(「저 나비」)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문체의 노래를 이어 가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의 노래가 자신의 불우(「불우한 악기」)를 다하며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어떠한 근원적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시편의 내용과 겉표지 색이 너무나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녀는 나를 자신의 노.. 2021. 8. 13. 임지은의 <<무구함과 소보로>> 부스러기 작명소 - 임지은의 『무구함과 소보로』를 읽고 * 들어가며 사물에 따라 이름 붙이는 일은 중요하다. 이름을 붙이게 되면 어떠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름과 일가견이 있는 나의 경우,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나란히’라는 이름이 너무 예쁘다고는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지고 살아온 나는 단 하나의 프레임에 갇혀 수많은 내가 될 수 없었다. 나란하지 못하고 서재가 질서정연하지 못한 나도 나이고, 척추가 비뚤어져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인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팔자도 아니다. 신문에 내 이름이 나면 누구라도 너무나 확연히 기억할 테니까. 그냥 흔한 이름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쁜 짓을 해도 ‘동명이인이겠지?’하고 지나갈 텐데 말이다. 특별히 저녁 스포츠 뉴스 자막에.. 2021. 4. 29. 잘 알지만 잘 모르는 시와 시인들 1 - 한용운 '님의 침묵' 감상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을 길을 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꿈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 2020. 8. 23.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