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서 30장 15절~18절
15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 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16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 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저는 광복절이 다가오면 보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동주’라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긴 것인데 이 영화를 찬찬히 보게 되면, 오늘 이 날이 비단 그냥 하루 쉬는 날이라는 의미에 만족하지 못할 상황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의 상황에 대한 묘사인데요. 일본은 당시 우리 나라를 식민지화하여 제국주의의 의식으로 조선을 다스렸습니다. 총과 칼의 무력을 썼고 심지어는 군사력 증진을 위해 징집과 생체실험까지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각종 무기를 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착취의 만행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일제가 악독해져 가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열강국들이 일본을 조여 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승리를 위하여 스스로 머리를 쓰고 갖은 수를 썼지만, 마침내 악은 멸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역사의 판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이어 영화에서는 그 역사의 흐름 가운데 두 사람이 나오는데요 그들은 윤동주와 그의 사촌인 송몽규 선생입니다. 그들에게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러한 악에 대처하는 방식입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세상에 태어난 두 사람은 거대한 악 앞에 무기력함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이 영화에서 송몽규가 윤동주를 향하여 한 한 줄의 대사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나는 총을 쥘테니, 너는 시를 써라’ 라는 대사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독립을 6개월 앞둔 어느 날 차가운 감옥에서 죽어갔습니다. 바로 민족의 독립을 최선을 다해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월이 지났어도 이들이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들 덕에 우리가 이렇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온 것 아니겠습니까? 옥고 속의 기다림은 독립을 이루는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기다림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이 생깁니다. 어떨 때는 이런 일이 의미 없이 느껴질 때가 있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이 오지 않아 지친 나 자신을 볼 때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일까?라고 질문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고 갖가지 술수를 계획하고 실행하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는 게 참으로 나약해서 상황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면 뵈는 게 없어집니다. 그렇게 믿음이 신실하던 사람도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지쳐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봅니다. 하지만 결과는 변변치 않지요. 하나님께로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고 악으로 행한다면 멸망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 중요한 질문을 저와 여러분에게 던져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이 오지 않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고는 하는데 그때 다음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시는 것인지?
이 시간 오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이사야서 30장 8절에서 11절 읽겠습니다.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방금 읽었던 내용에 보시면, 전쟁에 대비하는 유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일제의 식민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쟁에 대비하여 유다는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무기를 정비하고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 주변 촌락을 허물며 주민들을 무리하게 노역에 동원했습니다. 앞서 이사야는 전쟁 준비에만 집중하여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는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고 이에 더불어 더 최악인 상황은 이사야 30장 8절에 보시면 후대에 영원한 증거를 삼기 위해 이들의 악독을 책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악독은 이러합니다. 거짓말과 하나님의 법의 듣기 싫어하는 것, 선지자들의 사역을 방해하고 급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가게 하라는 악독을 저지릅니다. 하나님 앞에 성벽이 터질 듯한 죄를 짓고 있는 유다는 이러한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무기를 정비하고 여기에 더하여 애굽과 군사동맹을 맺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출애굽에서 맺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의지하게 되는 것은 강대국의 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그들은 강대국과 이중계약을 체결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결과는 14절과 같지요.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4 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토기장이가 완성된 토기를 아낌없이 깨는 장면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일반 사람들에 눈에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데 토기장이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자신이 기준 하는 좋은 토기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 토기를 깨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눈에 차지 않는 백성들을 바르게 하기 위해 정금과 같이 쇠뿔에 지지고 어쩔 수 없이 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시고 안내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우리 또한 전쟁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길은 무엇인가요?
첫째, 15절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어찌 보면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것으로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조용히 회개할 때, 내 힘으로 하지 않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잘못을 묻지 않으시고 나의 문제들을 나보다 앞서 대신 싸워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루 하루를 돌아보면 유다와 앗수르와의 전쟁과 같이 우리의 삶도 전쟁과 같습니다. 평안한 날이 몇 날이나 있겠습니까? 회사 걱정, 돈 걱정, 자식 걱정 등등 많은 온갖 세상 걱정들이 전쟁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못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애굽과 같은 악행을 행하며 세상에서 행하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강하지만 비루한 방법들을 고안해 냅니다.
하지만 이럴 때에 우리가 처음 해야 할 방법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약한 것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강함이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치부를 알고 계시고 우리의 가장 연약한 곳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내어놓지 않으시고 덮어주시며 우리를 위해 삶의 전쟁 가운데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회개한 후에도 다시금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의지하지 않으며 평안함에 안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라는 부분에 주목해야 할 이유입니다.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다고 생각했지만, 때때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그를 측은히 바라보고 있는데 탕자는 불안감에 도리어 이런 말을 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누가복음 15장 21절)
죄를 짓고 회개를 했으면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다시 불안해 하여 죄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의 문제를 맡겨야 하는데 자꾸 불안하니까 다시 돌아가서 자신의 방법을 써버리는 것입니다. 조용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또한 이 자리에 서 있는 저에게도 강권드립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는 그 길에 서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누가복음 8장 28절의 말씀처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이제는 조용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의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바로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 31장 33절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며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그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악독을 기록하시는 대신에 그들의 마음을 기록한다고 하십니다. 어떤 마음을 기록하십니까? 하나님의 법이 마음속에 있는 것과 그뿐 아니라 도구로서의 언약이 아닌 하나님과의 생동하는 관계 가운데 있는 것을 기록하신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포도와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십시오. 열매는 인고의 결과입니다. 열매들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나무를 신뢰함으로 기대어 더욱 기름지고 아롱질 때를 잠잠히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을 신뢰함으로 관계 회복에 이르고 그로 인해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뜻이 달랐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관계 회복이 아닙니다. 그들은 잠잠하지 않고, 스스로 요동치며 동동거립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대항하여 지금은 말을 타고 도망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급기야 거기에 더하여 더 빠른 짐승들을 원한다 말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많은 문제들을 놓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더 강력한 것을 주세요. 더 빠르게 해결해주세요 라고 간구하는데 도대체 아무리 해도 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아이에게 위험한 칼을 주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쉽사리 주시지 않는 것은 그에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주시고 안 주시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아이가 자신을 부모가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을 모를 때에, 즉 자신과 부모의 관계를 깨닫지 못할 때에, 아이의 눈은 칼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 칼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하나에 떼를 씁니다. 허나 그 칼을 휘둘렀을 때에 생겨나는 일에 대해서는 한 치 앞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이 칼을 주게 되면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게 누가 되었든 해를 입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을 먼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을 구하여 받든지 그때가 어느 때이든지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언약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말을 타고 빠른 짐승을 타고 도망하여야겠다고 그것을 달라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수렁에 빠질 때일수록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회복된 관계 위에서 기다릴 때 그것의 유익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설교 초반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제가 드렸던 질문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시는지?’의 질문 말입니다.
그 답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우리를 기다리십니까?
저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비록 빠른 짐승으로 나의 방법을 행하여 결국에는 초라한 산꼭대기의 외로운 깃대와 같아 있을지라도 이제라도 돌이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 주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오늘 본문 18절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너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며 너희에게 사랑을 베푸시려고 하신다.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너희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기 위함이며 이제 그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주실 열매를 신뢰하며 잠잠히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보증 수표입니다. 광복절을 맞이한 오늘,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의 기다림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듯, 우리 또한 소망을 품고 하루 하루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침내 회복하시며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잠히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늘의 아롱진 열매가 우리의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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