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오늘은 팔복 중 세 번째 말씀인 ‘온유한 자’에 대하여서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나누었던 가난함은 프토카스로 영적인 파산자로서
하느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라 했고,
그러한 고백 위에 우리의 애통은 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우는 자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팔복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한 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장면이라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온유한 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냥 마냥 참는 것, 착한 것만을 이야기 할까요?
여기서 쓰인 온유함이라는 것은
'praos' (헬라어-프라오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유순하고, 온화하고, 부드럽다라는 뜻을 가지며
특별히 이 단어는 길들여진 망아지를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즉, 말하자면, 온유함이라는 것은 제어된 힘이며,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낮추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유하다는 것이 무조건 바보처럼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온유하셨던 분, 스스로 자신을 온유하다고 하신 예수님도
화내고, 지적하고, 분노하고, 혼내고, 반대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턱대고 화를 내신 분이 아니라 그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서는
"예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온유함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함을 지닌 분이시기에 결코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무턱대고 공격적이지 않고, 이유 없이 상처 주지 않으셨으며,
가장 비교적 부드럽고 절제된 상황 가운데 말씀하셨고,
어떤 순간 무엇인가를 지적할 때에도 겸손하게 사랑을 담아서 상대를 존중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주위에 공격이 있었을 때는 어떠하였습니까?
죄 없는 자는 돌로 쳐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비판을 그냥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나 자신의 기준이 아닌 하늘의 기준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던 것을 보면
우리 또한 온유함의 덕목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느 극장에서의 일입니다. 모자를 벗어야 하는 공연장의 규칙을 어긴 채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그것을 보고 주의를 주어서 모자를 벗도록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안내를 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먼저 반가운 소식을 안내 드리려 합니다.
저희 극장에서는 오늘에 한해서 80세 이상의 어르신들에게는
모자 쓰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남자가 조용히 모자를 벗는 것이었습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수도 있고, 직접 지목하면서 지적을 할 수 있고,
혹은 그냥 지나치거나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자는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아무렇게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이를 위해서 기꺼이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고민하였습니다.
이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온유한 순간을 위해 잠시 고민하는 일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고민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가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나는 온유한 자니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온유한 것을 위해 고민하고 연습을 해야하고
이것을 항상 삶 가운데에서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평상시에는 온유함을 드러내야 할 때가 별로 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온유함을 언제 드러내느냐를 살펴보면
누군가에게 불평하거나, 지적할 때, 내가 손해를 보거나 기분이 나쁠 때,
문제가 생겨서 해결해야 할 때, 자녀나 며느리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배우자가 의견 차이가 있을 때 이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온유함이 있느냐 없느냐가 드러납니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갈라디아서 6:1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온유함이 필요한 순간은 기분 좋을 때가 아니라
훈계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지적할 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온유한 자가 된다는 것은 무조건 참거나,
그냥 웃어준다거나 대충 넘긴다거나 단순히 잘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순간적인 부정적 감정을 잠깐 내려놓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잘 유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장 적절한 표현방법을 잠깐이라도 고민한 뒤 행동하고 말하는 것,
또한 그것이 순간 순간 선택으로 이어지고 습관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온유함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자기 안에도 평화가 있지만
공동체에도 유익을 주어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마음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가
개인적으로 내 안의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나서 내 안에 하느님 나라를 경험한 사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때,
나오는 첫 번째 성품이 바로 이 온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세상을 건강하고 바르게 하고 다수에게 유익을 주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자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온유라는 것이 무조건 유순하고 착하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지혜롭게 하지만 단호하게 할 때는 그리 해야하는 것입니다.
바보처럼 참는 것만이 온유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온유의 기준은 하느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온유함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요?
온유가 좋은 것은 알겠지만 꼭 온유하고 싶은 이유가 없는데
왜 꼭 온유하라고 하나요? 라고 질문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서 온유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데
혹은 온유한 것이 내 스타일이 아닌데 꼭 온유해야 하나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도 한때는 너무 유순해 보이는 것이 싫어서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열심히 읽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온유해진다고 해서
예수님만큼 온유해질 수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에
굳이 지켜야 할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온유함이라는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 주어지는 천성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온유함이라는 것은
망아지 같은 내가 하느님 앞에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워야하는 것이고 살면서 노력하고 습득해야 할 성품입니다.
마치 두 발 자전거를 타려고 개발하는 것 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태어날 때 기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 가지고 본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아니면 예민하냐 아니면 무던하냐 이런 것들 말이죠.
이것들은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천성이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사람 안에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성격입니다.
그래서 가정이나 사회 속에서 영향을 받는 것에 따라,
좋은 환경이냐 나쁜 환경이냐에 따라 성격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성격대로만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이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성격을 다듬고
부족한 부분을 성숙해 나가는가가 그 사람의 성품을 만들어 나갑니다.
말하자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기질,
그리고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 성격,
마지막으로 성품은 이 안에서 성숙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예민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긍적적으로 성품을 개발해 나가면, 세심하게 자신을 잘 관리하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도 그렇게 세심하고 주의 깊게 관찰해서 남을 잘 볼 줄 압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부정적으로 성품을 키우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까다로운 사람이 되고 어떤 일에 부정적으로 지적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세심함이라는 기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긍정적인 성품으로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무딘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긍정적으로 성품이 발전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사람은 상당히 남을 잘 받아주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지요.
그런데 부정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게을러지고,
남에게 신경 쓰는 일을 귀찮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성경에서 나오는 온유라는 것은
인격이고 성품이며 이것은 배우고 자라가야 할 방향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온유한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듯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시편의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를 인용하여
사람들에게 새 말씀을 전하여 주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겠다는 이 말씀은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한 말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그리고 뒤이어서 비슷한 늬앙스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시편 37:22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29절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이 본문들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생각나게 합니다.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말입니다.
출애굽 과정 중에 온유하지 못했던 백성들
즉,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만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땅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만이 가나안에 들어갔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처럼 땅을 차지하는 것, 꿈을 이루는 것은 온유한 자들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은
우선 현재의 하느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품을 따라 온유하게 살면
하느님은 우리의 온유한 행동을 바탕으로 지금의 나의 삶의 자리에
가족과 교회공동체와 직장과 사업 가운데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고
온유의 열매인 평화와 화목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이 하느님의 주시는 땅이라는 것이죠.
또 나아가서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 내세의 천국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라는 말은 상속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온유한 자는 하느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첫 마음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기 때문에
마침내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
말씀을 맺겠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제가 대학원에서 조교로 있었을 때였어요.
항상 강사로 오시는 분이 계셨는데
저의 나름대로는 온유하게 겸손하게 그 강사님을 대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그 강사님이 학과를 운영함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분이셨기에
사비로 커피도 사드리고, 오시면 시원한 물도 내어 드렸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치 않은 것까지 내어 놓으며
누가 보면 바보같다 할 정도로 그 강사가 무례하게 행동하여도
꾹 참고 모든 것을 내어 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온유의 방법을 끝까지 고수하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맞습니다. 번아웃되어 나중에는 예전처럼 말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해서
그 강사분과 오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저의 잘못은 온유함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제 안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온유함의 힘은 우리 안에 그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온유함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온유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지 못합니다.
완전한 온유는 오직 예수님 앞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라는 성품은 하느님 앞에서 길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 분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사는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참된 주인으로 여기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도와주셔야
우리 안에 온유함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온유함을 배울 수 있도록 주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질문 하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에 앞서서 제가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회개하면 보여지는 성품이 온유라고 했는데,
내가 과연 배우자와 자녀들 앞에 온유한 모습을 보이고
그로 인해서 그들이 온유한 자로 설 수 있게 돕고 있는 자인가?를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다시 마태복음 5장 1절로 되돌아가셔야 해요.
예수님께서 앉으신 산에 시선을 맞추고
다시금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 온유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온유함을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나의 가족과 교회 지체들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면
쉬이 지나치지 마시고
꼭 고맙다라고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말씀해주세요.
물론 어렵지요. 부끄럽구요.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연습하고 배우고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유를 실천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 힘이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힘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매일의 삶 가운데에서
주님께 배우고 연습하여야 긍정적인 성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신앙의 실천을 결단하였을 때,
마태복음 11장 29절 후반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온유의 짐을 지는 자에게 쉼과 위로와 격려를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의 자리 가운데에서 주님의 온유를 배워 나아가시는
저와 교우님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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