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안고 태어나는 계절
- 최지은,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를 읽고…….
이 시집 속 화자 가운데 중요한 이미지를 하나 꼽자면, 물의 이미지라고 말하고 싶다. 더욱이 흘러가는 물이 아닌 시집 속 (「전주」)에서처럼 웅덩이에 고인 물의 이미지이다. 그녀는 이 웅덩이 속에 자신의 비밀스러운 아픔을 저장하고 있다. 시인은 ‘젖은 그림’(「기록」)과 같은 시어들을 부유하게 하여 ‘따로 붙어 있는 다른 계절’(「전주」)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한다.
깊고 깊은 웅덩이 속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그녀의 무의식적인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작품에서는 이것을 ‘꿈’ 또는 ‘꿈속’이라고도 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필연적으로 지나온 세계에서 ‘듣고 싶은 말이 들릴 때까지 시를 쓰고’(「창문 닫기」)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웅덩이에서는 어떤 것들이 숨겨져 있을까? 시인은 그 속에서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했을까?
먼저, 시적 화자의 무의식 속에는 ‘가족’이 존재한다. 그 구성원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큰엄마, 새엄마, 언니, 동생으로 현재는 그 존재가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시적 화자의 현재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정」)
이 구성원들 속에서 화자의 내면세계를 처음 열어주는 역할은 ‘다른 사랑을 찾아 집을 떠나버린 어머니’로부터 시작되며, 그런 어머니에게 화자는 ‘신이 나도록 떠들어보기도 하지만’, 끝내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있다. (「칠월, 어느 아침」) 시인은 이것을 (「한없이 고요한, 여름 다락」)에서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로 표현하게 된다. 이처럼 어머니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나 그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말을 걸수록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원초적인 내면세계이며 ‘영영 알지 못하는’,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 없는’(「칠월」) 그리움의 대상으로 표현한다. 더불어 시인은 그곳을 ‘나의 여름이 시작되는 곳’「(칠월, 어느아침)」으로 명명하고 있다.
또한, 그녀에게 있어서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표출되는 공허함을 더욱 확장한다. 그 구멍은 화자에게 넓이와 깊이를 더해가며 이는 ‘아가미’(「창문 닫기」)와 같이 ‘벌어진 상처’(「밤, 겨울, 우유의 시간」)로 나타난다. 시인은 이것을 슬퍼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을 보며 (「사랑하면 안 되는 구름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름에 대해」) 연민의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에 더하여 ‘검은 개’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아버지로부터 파생되는 존재이며, 아버지의 어두운 이면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이 ‘검은 개’는 ‘나는 자살 유가족입니다’라는 표현으로 아버지의 생을 삼켜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너 홀로 걷는 여름에」) 그러나 시인은 이 ‘검은 개’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가 없는 빈방을 지키며 그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를 달래듯 이 개를 달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 개는 나를 오래도록 핥고 있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마치 ‘할머니가 다시 태어나려고 꿈을 고르듯’(「여름이 오기 전에」) 아마도 화자는 이 ‘검은 개’가 아버지로 환생하기를 바라고 있기에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꿈에는 경계가 없으므로(「삼나무로 가는 복도」)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짧았던 봄밤인 동시에 ‘지금, 여기’(「십이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웅덩이의 시어들은 ‘침전된 아픔’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것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따뜻한 기억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보고 있기에 지난 순간들을 짧고 아쉬웠던 봄밤이라 지칭하고 있다. (「히어리의 숲」)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여름은 ‘아픔을 안고 태어나는 계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속에서 ‘그러나 인간에게는 깊고 넓은 것이 있어’와 같은 이야기가 들릴 때까지(「나는 나라서」) ‘자신만의 장난을 이어가듯’ 자신만의 시 쓰기를 이어갈 것이다. 자신의 시가 지난 계절의 아픔을 품어 안으며 어쩐 일인지를 ‘나를 멈춰서게 하는 사랑이 있는 계절인 여름’(「너 홀로 걷는 여름에」)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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