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 작명소 - 임지은의 『무구함과 소보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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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사물에 따라 이름 붙이는 일은 중요하다. 이름을 붙이게 되면 어떠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름과 일가견이 있는 나의 경우,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나란히’라는 이름이 너무 예쁘다고는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지고 살아온 나는 단 하나의 프레임에 갇혀 수많은 내가 될 수 없었다. 나란하지 못하고 서재가 질서정연하지 못한 나도 나이고, 척추가 비뚤어져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인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팔자도 아니다. 신문에 내 이름이 나면 누구라도 너무나 확연히 기억할 테니까. 그냥 흔한 이름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쁜 짓을 해도 ‘동명이인이겠지?’하고 지나갈 텐데 말이다.
특별히 저녁 스포츠 뉴스 자막에서, 애정하는 시인의 시 제목에서, 아이들이 자라나 부르는 동요에서 내 이름은 가끔 불편한 인연들에게 기별을 주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변모했고 그 변모는 미래에도 계속되기를 희망하는데 그들이 옛적의 내가 생각나 ‘식탁에 둘러앉아 가끔 물을 마실 때 나의 미래가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게’(「구성원」) 되면 그것보다 (「무서운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쉬울까?
이러한 불편한 과거들을 가지고서 작명소에 찾아갔다. 시인이 되기엔 이름이 뻔하고 ‘부사(副詞)’보다 수많은 ‘명사(名詞)’의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주어진 이름을 뒤로 하고 수많은 내가 되어 변주되고 싶었지만, 순간 순간 종이컵을 구겨버리고 싶은 마음에 작명소에 찾아간 것이다. 그 작명소의 이름은 ‘부스러기 작명소’였다. 나는 그곳에서 꽤 괜찮은 변주법을 보았으며, 그곳의 주인은 ‘지워버려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 부사를 사랑한다’(「간단합니다」) 하였고, 다른 이름을 지어가는 것보다 ‘가끔 다르게 불러주는 일이 필요하다’(「존재 핥기」)고도 말해주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아 ‘눈썹 뼈 근처를 긁적거렸지만’(「함묵증」) 여러번 자세히 보니 ‘수많은 존재가 뜻밖으로 튀어 오르는 맛’(「존재 핥기」)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느끼게 해 준 작명소의 주인은 바로 ‘임지은’이었고, 그녀를 확인하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눈치챘겠지만, 앞의 이야기는 ‘임지은’의 시집을 설명하기 위해서 쓴 허구의 이야기이다. 허구라 할지라도 그 안에 뼈대를 빼내어 살펴보면 그녀의 시에서 보인 특징을 녹여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 특징 중 하나가 ‘변주’인데 그녀의 기법은 맹목적이지 않고 특정한 대상을 놓고 변주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필자는 그녀가 변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을 풀어서 그녀의 시집을 소개하려 한다.
2. 명사의 역할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
지퍼를 열었는데 코끼리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오렌지였다
나는 덜 익은 오렌지를 밟고
노랗게 터져버렸다
가끔은 푸른 안개가 묻어 있어도 좋았다
이제 나는 오렌지가 어떤 세계의 날씨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박스째 진열된 과일 가게에 갔다
기다린다는 건 잘 익은 바나나
지갑을 열고 거짓말을 꺼냈다
딸기였다
손바닥 위에 씨앗 코끼리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는 분홍의 과즙
딸기 속에는 아주 작은 물고기가
헤어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거짓말이
어떤 세계의 바다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오렌지 속에 코끼리를 넣고 나왔다
-「과일들」 전문
임지은의 시를 보기 이전의 나는 고정관념이 많은 독자였다. 나에게 있어서 시 읽기는 의미를 찾아 나서는 사냥과 같았기에 이전에는 시어 하나 하나의 숨어 있는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해 있었지만 그녀의 시는 달랐다. 그녀의 시에서는 의미 안에 시어를 가두어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의미 밖으로 시어들이 돌출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었다. 위의 이야기에서 임지은 시인을 ‘부스러기 작명소’의 작명가로 비유한 이유도 시집 안에서 수많은 소보로의 부스러기와 같은 명사(존재)들에게 의미보다는 이름(명사)을 붙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명사들의 등장으로 인해 각 단어들은 사물들이 각자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처럼 자신들의 윤곽을 명확히 가지게 된다. 가령 시집 제목에서 ‘무구하다’라는 형용사가 명사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무구함’으로 바꿔 쓴 후 ‘소보로’라는 단어와 나란히 배치하자 ‘무구함’ 역시 사물처럼 자신만의 공간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그녀는 어떠한 의미보다 존재하는 것들에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였으며, 이것들은 독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에게 입체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용한 시에서도 볼 때, 우리가 익히 알던 보통의 명사의 역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떠한 문장에서 ‘코끼리’를 보면 ‘코끼리’가 떠오르고 ‘오렌지’ 하면 ‘오렌지’가 떠오르듯이 이러한 명사들은 어떠한 틀에 방해를 받아 더이상 그 운동성을 부여받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각각의 명사를 모아 시의 의미를 증폭시키고 오히려 시어들이 가지고 있는 명확성으로 인해 더욱 모호한 대상으로 변주하여 독자에게 ‘거짓말이 어떤 세계의 바다인지 알아내는 일’에 동참시키게 한다. 간혹 다른 시집들을 보게 되면 시인 자신이 선두에 서서 독자로 하여금 시 속의 의미를 찾아보라고 닦달하는 배려 없음에 지치기도 하는데, 그에 비해 그녀의 시는 독자를 먼저 시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생각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상냥한 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늘어나는 부스러기들의 결합
아침에게 발견되지 않으려고 장롱 안에 숨었다
나라는 사실이 숨겨지지 않았다
벽을 문지르자 덩어리가 만져졌다
밀실 안에서 가죽이 부푸는 방식으로
나는 두 명이 되었다
깜짝 놀라 철제 손잡이를 돌리자
문밖에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오늘은 어떤 나로 외출할까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나는 속눈썹을 붙이고 외출을 했따
어떤 나는 안경을 쓰고 도서관에 갔다
어떤 나는 지하철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
나는 매일 다른 나와 마주쳤다
자주 너답지 않아, 라는 말을 들었다
나다운 게 뭐지? 생각하는 동안 다섯 명이 되었다.
말투라든가
웃을 때 입 모양
음료 안에 생각을 젓는 속도
빠르게 분리되어가는 나와 우리
(중략)
바닥에는 하얀 종이 뭉치들이 굴러다녔다
나는 가끔 편의점이나 서점에서 목격되었지만
- 「내가 늘어났다」 부분
밤이 되면
내가 먹은 것들이 쏟아져
이상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식초 안에 벗어놓은 얼굴
입가에 묻은 흰 날개 자국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
무구함과 소보로
무구함과
소보로
나는 식탁에 앉아 혼자라는 습관을 겪는다
의자를 옮기며 제자리를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미래에 있다
놀라지 않기 위해
할 말을 꼭꼭 씹어 먹기로 한다
- 「론리 푸드」 부분
시집 제목이 포함되어 있는 시집 제목이 포함되어 있는 「론리 푸드」에서는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무구함과 소보로’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인 셈인데, 이에 주목하여 다른 시들을 살펴보면 “보풀처럼 나를 똑똑 떼어낸다”(「벤딩 엄마」) 라거나 ‘함부로, 쉽게, 간단하게/지워버려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사를 사랑합니다’(「간단합니다」) 등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로서의 완결된 ‘부분’이 시적 대상들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이 「내가 늘어났다」에서 볼 수 있듯이 홀로 고립되지 않는 ‘우리’를 만들게 된다. 그녀의 시 세계에서는 나와 너가 분절되지 않으며 본디 예속된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가끔 편의점이나 서점에서 목격되는’ 부스러기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과거라는 사적인 역사를 가지고서 결합하게 될 때 ‘미래’로 가게 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들은 「개와 오후」, 「자동 조정 장치」와 같이 시간을 담거나 거스르는 이야기들이 자주 출현하고, ‘엄마’나 ‘할머니’처럼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화자의 분신들을 자주 등장시켜 미래의 자신을 비춰내기도 한다. 이렇듯 부스러기들의 유기적 연대는 덩어리로의 관계를 만들기도 하며 이러한 것은 퍼즐 조각(「퍼즐조각」)이 맞춰지듯 미래로의 시간으로 변주하며 나아가고 있다.
4. 안과 밖의 경계에서
우리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이 집에서 나가지 말래요
밖은 너무 위험하니까
문을 경계로
안은 집이 된다
그런데 엄마는 언제 오신다니?
저녁이 되어도 초인종은 울리지 않고
아이는 신주머니를 안고 잠이 든다
신주머니 안에는 신발이 잠들어 있겠지만
아이를 흔들어 깨운다
아줌마가 왜 여기 계세요?
여긴 우리 집이잖아요
문을 경계로
어떤 꿈은 현실이 된다
엄마를 부르기 전에 어서 나가주세요
집이 위험해지기 전에 밖으로 나간다
(중략)
지나가던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한다
재훈이 어머님 아니세요?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2인용 자전거가 넘어져 있다
(중략)
안과 밖이 통로처럼 뒤엉켜 있다
- 「소년 주머니」 부분
임지은의 어떤 시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를 새삼 인식할 때 일어나는 상황의 당혹스러운 신선함 혹은 낯선 흥미를 전한다. 이런 시는 그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안’과 ‘밖’이란 구분, ‘나’와 ‘나 아닌 자’의 구분을 다시 살피게끔 만든다. 그녀는 ‘안’과 ‘밖’의 경계를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으며 그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안과 밖을 ‘꿈과 현실’로 대입시킬 수 있다. 인용된 시에서 ‘문을 경계로 어떤 꿈은 현실이 된다’라고 말한 것처럼 시인은 그 경계의 확장을 꿈에서 발화하고 그것은 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현실로 이어지는 무한대성을 가지고 있으며 (「벤딩 엄마」)에서처럼 또 다른 성격의 무한대성으로 현실의 한계성을 꿈에서 극명하게 되풀이하기도 한다.
이처럼 임지은에게 있어서 꿈이라는 것은 그녀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그녀는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잠꼬대와 같은 시를 읊조리며 독자들에게 잃지 말아야 할 경계의 지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있다.
5. 나가며 – ‘Can you do this all day?’
임지은의 시를 읽을 때 너무나도 신이 났다. 그녀가 쓴 시어들을 가방 속에 쏙 넣고 다니고 싶을 만큼 말이다. 시를 쓰는 게 뻔하지 않게 쓰는 일이여야 하는데 그녀의 시집을 받아 읽으니 변주하는 방법을 그나마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변주를 통해 그녀가 구사하는 명사의 의미를 어떠한 한계를 넘어선 ‘존재’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 수많은 부스러기와 같은 존재들을 고립시키지 않고 ‘우리’라는 결합을 통해 시간을 변주하고 있다. 또한 안과 밖의 경계를 안내하여 그 지점에 대한 것들을 꿈과 현실을 오가며 질문하면서 어느새 밖에 있던 독자들을 시집의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임지은의 변주법들을 보면서 그녀가 어떻게 시를 썼는지가 궁금해졌다. 검색엔진을 돌려 ‘임지은’을 검색하니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나를 반성할 수 밖에 없었다. 『씨네 21』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말하기를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최종심에 여러 번 올랐지만 등단하지 못해 더 이상 안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금 시 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육아와 글 쓰는 일을 병행해야 했던 그녀는 시간을 쪼개서 새벽에 카페에 가서 시를 썼고, 주말에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시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를 보면서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기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더불어 ‘나에게도 그녀와 같은 절박함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임지은의 시집이 나에게 ‘Can you do this all day?’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그 질문을 되내이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창문을 열어 놓고 젖어있는 얼굴을 내밀었다. 시집의 그늘 아래 내 얼굴이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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