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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팔복2-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by noobim 2020. 8. 21.

*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5:4. 공동번역서)

 

저번 주에 팔복의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에 대하여서 알아봤습니다.

잠깐 요약하자면, 가난한 자는 물적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말하기보다,

죄의 부채를 감당할 수 없이 파산당한 자처럼

주님에게만 기댈 수밖에 없는 내면의 가난이라 전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죄의 부채를 탕감할 수 있는 이는 하느님밖에 없다고 인정하여

주님의 산 앞에 앉은 자에게만 그 천국이 임하고,

그 천국은 다가올 미래뿐 아니라 현재에서도 주어지는 것이라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복하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부를 축척하고

장래에 걱정 없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어느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하늘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며 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우는 일이겠습니까?

아기의 탯줄로 산소를 얻다가

엄마와 분리된 후 자신의 폐로 최초로 하는 호흡이 바로 이 울음인 것입니다.

 

울어야 할 이유가 있을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병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우는 거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감정에 대해서

잘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건강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잘 살피고 정화시키고 마음껏 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는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놀랍게도 꽤 많은 장면에서 하느님은 울고 있는 자를 만나 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을 때, 하느님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는 자에게 하느님은 찾아오십니다.

 

저번에 나누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유명한 산상수훈의 핵심이 바로 팔복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 팔복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에서 사람을 모아놓으시고,

가장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시죠.

이 마음이 가난하다 라는 뜻을 설명을 드렸던 것 같은데 기억하시나요?

바로 프토카스와 페나스의 차이를 알려드리면서 가난의 참 의미를 알려드렸는데요.

이것의 의미는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라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죄의 상태를 어찌할 수 없는 영혼의 파산자와 같은 사람이라

하느님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 다음에 누구를 찾고 있나요?

바로 우는 사람들입니다.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하느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슬퍼하는 자, 애통하는 자, 우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는 자들아, 슬퍼하는 자들아, 너희는 행복해야 해, 너무 낙심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울고 싶을 때,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6장 13절과 고린도후서 1장 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고린도후서 1장 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가 힘들고 울고 싶을 때 우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울음이 애통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요?

돈이 없어서, 마음이 힘들어서 우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말하는 슬픔일까요?

이러한 울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의 슬픔은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할까요?

 

그 첫 번째 울음은 이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 우는 자입니다.

팔복의 시작은 마음이 가난한 자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났을 때, 그는 애통하게 됩니다.

왜 마음이 가난한 자가 주님을 만나면 울게 될까요?

 

성경 속에 힌트가 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5장 8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어 10절 후반절에는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어부였던 베드로가 물고기를 못 잡아 답답해 할 때에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물 내릴 곳을 다시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죠.

그제서야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뜻밖에 행동을 합니다.

그 앞에서 절규하며 소리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되시나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빛으로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왔을 때, 더러움이 드러나듯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된 것이지요.

그리고 울며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베드로를 주님께서는 일으켜 격려하시고 그의 제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 말고 또 예수님께 떠나라 말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가다라’라는 한 지방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마태복음 8장 34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이들도 베드로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과는 달리

이들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쫓아내었습니다.

둘 다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직면하였지만,

하나는 회개하며 울었고, 하나는 거부하며 울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마음이 가난하고, 하느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을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죄된 모습을 먼저 깨닫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방금 본 것처럼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죄가 없는 척, 약하지 않은 척 숨기거나

솔직하게 진심으로 하느님 앞에 엎드리는 것, 이 둘 중 하나이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라건데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원합니다.

그 분 앞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회개하며,

위로와 회복을 구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한1서 1장 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온 자의 첫 번째 태도는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숨길 수 없을 뿐더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용기 있게 결단하여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우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죄 많은 나를 긍휼하게 여겨달라고 말이지요.

 

두 번째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울음은 타인을 위해 우는 울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먼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발견하고,

울며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며 이윽고 그분의 죄 사함과 격려와 위로를 얻게 되죠.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주위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함께 마음으로 우는 자들, 슬퍼하는 자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기사를 접하게 되었는데 우

리의 뇌 속에서는 거울 세포가 있어서 누군가가 울면,

그것을 보고 우리의 뇌에서 그 사람과 같은 부위가 자극을 받고,

아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갖게 된다고 합니다.

래서 우는 사람을 보면 따라 울게 되기도 하고,

웃는 사람을 보면 미소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 그런 능력을 심어주신 이유는,

하느님이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이고,

나아가 우리도 서로 그렇게 서로의 아픔과 눈물을 공감해주고 위로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자신의 죄로 인해 우는 자임에 동시에

타인의 아픔을 보며 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0장 1절을 찾아보시겠습니다.

너희의 하느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렇듯 공감은 우리가 세심하게 개발해 나아가야 할 아주 중요한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마음을 끝까지 헤아리기를 놓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내가 그런 부분이 있어 부족한 면이 있다면 하느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내게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더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연습하고 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6절에 보시면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느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가 위로하셨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디도라는 사람을 보내서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을 위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직접 찾아와 위로하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내 육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나의 영적인 부족함에 대하여 울고, 우리 가족, 우리 교회의 지체, 우리 주위 사람들의 아픔을 위해

함께 울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말하시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죄가 많아서 우신 게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우셨습니다.

또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셨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보시며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단순히 백성들의 배고픔이나 마음의 상처로 인한 눈물을 보시며 운 것도 있겠지만,

그 영혼의 고통을 발견하고 슬퍼하시는 장면도 있습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이야기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세례 요한이 죽고

허탈해 하는 백성들을 보시며 마음 아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그 외에도 예수님은

무너질 예루살렘 성전을 미리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공감으로 나오는 울음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울음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은 카톡으로 연락이 왔길래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연히 갔다가 새까만 아이들 눈을 보자

아무 이유도 없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는 겁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저리 몸과 영혼이 메말라 가는 것을 보며

하느님께서도 이 아이들을 위해 울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울다보니 이곳에서 선교를 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전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던 선교사님에게서도

비슷한 고백을 찾을 수 있는데요.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을 위해 기도하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들 뿐입니다.

그들이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하고 화부터 냅니다.

(중략)

그러니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위로를 얻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람들을 위로하되 나아가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영혼을 보며 슬퍼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늘에 소망을 품고

진정으로 슬퍼하며 우는 자는 하늘의 위로를 받아 행복하게 됩니다.

이 모든 말씀을 기억하시고

그 안에 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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