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베드로 전서 1장 1절 – 6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느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몇 일 전 토요일에 우리 권사님들하고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오다가 웃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밤 꽃 나무 같이 생긴 것이 길에 가로수로 있어서 그거 아니냐고 한 권사님께서 물었더니
다른 권사님이 나이 70살이 다 돼서 그런 거 모르면 안되지 하시더라고요.
그걸 들은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또 덕분에 한 번 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꽃나무 이름도 이름이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도 70이 다 되어서도 모르면 안되는 게 또 하나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인생입니다. 더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물론 여러분들보다 나이는 적지만 얼마 전 목회에 도움이 될까 해서 시작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르신들을 상담하는 일입니다.
전에도 해왔었던 일이고 지금도 복지관에서 종종 일을 하면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담하는 내내 호소하는 것은
‘외롭고 고독하다’ 또는, ‘인생이 참으로 허망하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는 힘도 있고,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또 주변에 어울리는 사람들도 많고 했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이 어디에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죽었고 대부분은 자신을 배신하여 떠났다고 합니다.
어떤 어르신은 자신이 카바레 사장이라 이쁜 언니들도 많이 보고 그랬는데
이제는 늙어서 노망났다고 할까봐 그렇게 못해서 마음 둘 곳이 없다고 합니다.
또 자식들도 있었지만 평생 모은 본인의 재산을 가지고 분쟁을 하더니만
연락도 없고 소식도 끊겨서 단칸방에서 혼자 지내는 게 참으로 서럽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
얼마 전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봤습니다.
그 책의 서두에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느 날은 유시민이 40살이 되던 해에 아침에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더랍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대목에 보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삶의 유한성과 관련한 허무 의식을 이겨내야 한다고 써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돌아보면 알다시피 사람은 사람의 힘으로 이 허무함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마음을 달래는 세상의 것은 그 헛헛한 마음을 달래는 것 뿐이지 완벽하게 이것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힘은 유한하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의 힘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늙어야 합니다. 나이를 잘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하느님 품으로 잘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잘 산 것에 대한 증거가 되는 일이지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70이 다된 나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든 잘 고민해야 하는 일입니다.
-
저는 복지관에 상담을 오시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나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묘비명을 써 보는 일입니다.
만약 어르신의 묘비명을 쓴다면 무엇을 쓰고 싶으세요? 라고 말이지요.
요즘 어르신들 사이에서 생각해 볼만한 웰 다잉의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걸 써 봄으로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아마 종이와 펜을 나눠드렸을 것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묘비명을 한번 써 보는 것은 어떠할까요?
내 마지막에 어떤 글이 쓰여지면 좋을까 생각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 권사님은 뭐라고 쓰셨나요? 네 잘 하셨습니다. 우리 장로님은요! 와! 멋지신데요.
이처럼 자신의 묘비명을 써보면 좋은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묘비명에 쓴 대로 살도록 노력하게 된다 입니다.
둘째, 나의 삶의 지향점을 다시금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웰다잉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잘 정리된 죽음에는 어떠한 것이 필요할까? 라는 것에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많은 답변들이 있는데, 1위가 살아 있는 동안 충분한 재정이 확보되는 일이였습니다.
물론 중요하죠. 재정적인 부요가 있어야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묘비명에 ‘애들아 사는 동안 내가 돈이 필요했었어’라고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느님께 돌아갈 때, 우리는 어떠한 생각으로 나의 묘비명을 써야 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로 자랑할 만한 나의 묘비명은 무엇일까요? 허망하지 않은 나의 묘비명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 묘비명은 오늘 베드로전서 1장 1절과 같이 ‘나는 택함 받은 나그네입니다’라는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를 쓴 시기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고난이 삶에 대한 고난이 언제 끝날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와 같이 마음이 허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베드로는 우리가 이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택함 받은 나그네들이기 때문이다' 라고 그 이야기의 첫 문을 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무엇입니까?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입니다. 본향이 따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야할 곳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쓰인 나그네라는 뜻의 원어는 낯선 곳에 일시 체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택함 받은 나그네라는 것은 그 시선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흩어져 있지만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는 하늘 나그네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 본향을 잃어버리게 되면 고향을 잃은 고아와 같이 됩니다.
하느님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주할 영원한 곳이 이 땅이라 생각하기에 세상 사람들은 살아갈수록 공허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하늘 고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그렇기에 나의 묘비명을 쓸 때에는 하늘 나그네로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며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2절과 같이 주님의 뜻대로 나의 삶 가운데 그 뜻대로 소임을 할 수 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묘비명을 쓸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그리스도가 나의 산 소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산 소망은 어떻게 있어지는 것입니까?
3절의 하반절 내용을 보시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산 소망이라는 것은 거듭나야,
다시 태어나야 그리고 새롭게 되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있는
요한복음 3장 1절부터 5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에게도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진실로 진실로’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묘비명을 육신의 돌아감으로 쓰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써야 할 것은 육신에 따른 묘비명이 아닙니다.
육신의 묘비명을 먼저 생각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져야 하는 것은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먼저 사시는 영의 묘비명이 우리 안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4절의 말씀대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한한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가능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장 31절)' 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이야기처럼
우리도 날마다 예수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빈 무덤을 확인하고 날마다 예수 안에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
부활이라는 게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 유업을 잇대어 사는 자로서 이 부활이라는 사건이 우리의 삶에서 일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단 한번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이땅에서 또한 연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삶으로 우리는 부활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주장을 접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일
내 주장을 접고 하느님과 같은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
세상의 방법을 접고 천국 소망을 붙잡는 일
이 모든 것이 내 삶 속에서 부활을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이 땅에서 본향을 바라보며
내 삶의 자리에서 천국을 연습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영적인 묘비명을 세울 수 있습니다.
-
다음으로 베드로전서 1장 5절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묘비명을 세우기 위하여 산 소망을 가지고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5절에서는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위해 끝까지 주님을 믿는 일이며
우리가 힘들때나 고난 받을 때나 기쁜때나 슬플 때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주님의 세계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주님을 믿고 죽고자 하면 주님께서 살려주시며
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주님께서는 버려두시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고 일상 가운데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분이니
주님을 믿고 나의 영혼을 맡기는 일은 영 죽을 길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길인 것을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또한 우리의 묘비명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바라기는 ‘택함 받은 천국의 나그네’ 로 살며 그 묘비명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라는 천국의 묘비명이 그 마음에 세워지길 원합니다.
이 묘비명을 항상 간직하시어 본향을 바라보시고
이 삶의 자리 가운데 천국을 연습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럴 때에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처럼
땅을 딛었으나 하늘을 소망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마음 속에
세상이 주는 공허함을 바라보기보다 하늘의 소망에 더욱 시선을 고정했으면 합니다.
우리의 묘비명이 ‘예수 안에 기쁜 삶’이 되도록 일상의 삶 가운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림의 유익 (0) | 2021.08.13 |
---|---|
체휼하시는 하느님 (0) | 2020.09.02 |
팔복3-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0) | 2020.08.22 |
팔복2-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0) | 2020.08.21 |
팔복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0) | 2020.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