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을 길을 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꿈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에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전문
간혹, 작가를 잘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감상의 올무에 빠지게 된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보면 잘 모르는 시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새로운 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어쨌거나 창작은 이미 지어진 밥에다가
새로운 반찬을 더하여 올리는 것과 같기에
- 물론 이 반찬들은 참신하고 맛있어야 사람들이 먹긴 하지만...-
미리 지어진 것들에 대해서 더 깊게 바라보고 다시 읽는 일도 중요하다.
그 첫번째 이야기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한용운이 이야기 하는 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어렸을 때, 배웠던 교과서의 답정너의 시 해석으로는
그 님을 알아챌 수 없다. 그렇게 하면 고대하던 님이 가버리기 마련이며
혹여 발견한다고 해도 '민족', '조국', '부처', 혹은 '애인'으로만
좁혀 생각하기 쉽상이다.
그런 사고로 시를 읽을 때에 ‘님’은
나의 외면에 있는 타자에 불과하며
나와는 분리된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 '님'하고 친해져야 알 수 있는데
나와는 결코 상관이 없는 낯선 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서문인 ‘군말’을 자세히 보면
‘님’의 의미를 조금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테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만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한용운, 「군말」 전문
시인은 ‘님만 님이 아니라’라고 시집의 서언을 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분리된 타인
혹은 외재한 사람 만이 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기룬 것은 다 님’이라는 것에 눈길이 간다.
기루는 것은 무엇일까?
본디 '기루다' 라는 단어는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다' 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한용운에게 기루다 라는 의미는
내 '안'의 '님'을 말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용운이 시를 통해 님을 생각하는 것은
석가가 중생을, 칸트는 철학을, 봄비는 장미화를,
이태리가 맛치니의 정신을 깊게 생각하는 일인 것이다.
‘군말’ 뿐만이 아니다.
수록된 시들을 잘 살펴보면, 시인의 ‘님’은 ‘나의 님’으로 표현될 때가 많다.
그렇기에 한용운이 말하고자 하는 ‘님’이라는 것은
분리된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속한 것이고
침묵하면 더욱 선명히 자각되는 ‘자아의 내면’인 것이다.
그의 내면은 조국과 민족과 그리고 부처의 사랑으로 자각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를 쓰고 그의 시대를 여실히 살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님의 침묵은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즉시 해야 할 내면의 소리는 무엇인가?’
‘그 자각된 내면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므로
더 깊이 성찰하며 다시 읽어보아야 할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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