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태복음 5장 1절~3절)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2.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많은 이들이 이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 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혹자들은 그에 따른 대답으로 강의도 하고 책도 내고 합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도 행복에 대해서 갈구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주님은 세상에 내어놓은 아이들과 같은 우리에게 행복하기를 원하셨고,
그 행복을 원하실 뿐 아니라 ‘행복하여라!’(공동번역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여러분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묵상과 함께 말이지요.
행복이라는 단어가 조금 추상적이라 사람마다 정의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사전적인 의미로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입니다.
다른 의미로 본다면, 상황에 따른 자기만족이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을 비춰볼 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이란 뭇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말씀 가운데에서 말하는 ‘복이 있다(헬라어-μακαγίος,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도
긍정적인 환경에 따른 행복이 아닌 사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변치 않는 내적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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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팔복(八福)은 산상 설교(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의 첫 단락입니다.
그중 첫째 단락으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열두 제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제자가 된 후에 가르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윤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윤리,
즉, 하느님 나라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윤리를 제시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제자들)의 행복은
세상 기준과는 달라야 하며 구별되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먼저 1절에서 2절까지의 내용을 강해하며 그 뜻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원래 산이라는 곳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홀로 생각을 정리하는 곳이었습니다.
홀로 잠잠히 기도하시는 곳이었지요.
예수님께로 무리가 몰리면 피난처로 피하는 곳이 바로 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피하지 않으시고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무엇인가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무리를 보실 때, 측은한 느낌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나,
신앙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와 같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산을 오르신 것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산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집중해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에게 있어서 산이라는 장소는 어떤 특별한 의도를 지니게 될 때,
등장하는 일종의 암시(Plot)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은 모세가 하느님의 율법을 받았던 성소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이스라엘 사회에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이 뚱딴지같은 일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산’이라는 장소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모세가 하느님의 율법을 받아 중요한 장소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식된 산에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 앞에 제자들은 나아가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2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공동번역) 입을 여셔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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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아이와 같이 백지와 같은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아이와 같다는 말은 여기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연수가 차면서 신앙이 더 성숙해져야 하는데, 되려 퇴행적인 신앙을 가질 때를 말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 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타성에 젖어 신앙생활 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더하여 두꺼운 가면으로
내가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내가 왕년에는 좀 했지!’라고 생활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남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내가 세운 기준을 두고 남을 정죄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신 산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옛 율법에만 젖어 ‘내 신앙이 최고야’라고 나의 콧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새 율법을 내어주실 주님의 산을 겸손한 마음으로 올려 봐야 합니다.
그 산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해 기도하시던 장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묻던 장소입니다.
특별한 때에만 올라가신 곳이 아니라 매 순간 매일의 삶 가운데에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장소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그곳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그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새 율법, 새 은혜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새 율법을 듣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소유할 수 있는 기본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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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3절입니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 이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어떤 종류의 가난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영적인 가난을 뜻합니다.
조금 어렵지만 원뜻을 이해하려면 헬라어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이곳에서 쓰인 헬라어의 단어는 'ργοκαs (헬라어-프토카스)'인데
이 뜻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는 것조차 몹시 부끄러워하는 거지를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난에 대하여서는 페나스라는 단어를 많이 쓰게 되는데
이것은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그저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의 가난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토카스한 사람은 페나스한 사람보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뜻을 알게 될 때, 인간의 나약함 앞에서 인간은 간신히 역경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페나스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프토카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무능력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씀 가운데 이렇게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궁핍하고, 움츠리며, 굽실거리는 거지들은 행복하다! 라고 말이지요.
누가복음 18장 14절, 야고보서 4장 10절에서 보여지듯,
주님께서는 자만하는 사람들,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낮추시고,
자신을 낮추는 자들을 높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인생 가운데서 무엇인가 일이 잘 풀리고 만족된 상태가 되었을 때에는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부요한 것 같지만, 기도하지 않게 되고, 하느님을 향하여 있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심령이 하느님을 갈급하게 될 때에는, 영적으로 공허하고, 내가 비천하게 여겨질 때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느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해지는 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매일 말씀 앞에 서는 일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묵상할 때,
나로 가득 채워진 마음이 비워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나를 옭죄었던 욕심은 벗어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눈이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는 “하느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라고 예수님 앞에 구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예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고 돌아가게 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일입니다.
주님 앞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을 앎에도 우리는 죄의 습성에 너무나도 쉽게 빠지고 눈이 가려지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나를 치켜세워 교만할 때 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자만하지만 이것은 결국 쓰러지게 되는 것은 나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주장하라, 자기를 자랑하라, 자기의 힘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라”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나의 강함이 아닌 연약함을 인정할 때,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 주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때 서야 비로소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겸허한 뉘우침과 고백 속에서 우리의 실패를 경험하게 될 때,
오히려 더욱 큰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순간보다 더 가까이 그의 곁으로 이끌어 주시고
그 분을 완전히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 봅시다.
누가복음 16장 19절-25절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오늘 팔복의 첫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은 내세의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가올 미래 또는 까마득한 천년왕국을 이야기 하는 것도 있지만,
바로 현재에 나에게 임하는 천국을 말하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 즉,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현재의 천국인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면,
나의 빈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 놓지 못하면,
부자와 같이 내세에 있을 법한 괴로움이 현재에도 있게 되고,
나사로가 살았던 괴로운 현재가 나의 것이 되어
눈앞에 혀끝에 물 한 방울도 허락지 않는 음부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사로와 같이 아무 것도 없어서 주님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상황은 괴로움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천국이며,
그 천국은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 당도할 천국에 까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음부에서의 괴로움을 택할 것입니까?
아니면, 나를 비우고 하느님을 채워 천국의 위로함을 받으실 것입니까?
그 선택은 말씀을 대면고 있는 지금 여러분들의 몫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 천국을 소유한 하느님의 백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자신의 영적파산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의지해 나가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때 내가 죄인 됨을 분명하게 시인하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요동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서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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