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 시 소개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 매일'

by noobim 2020. 8. 20.

* 노련한 마법사, 반짝이는 유리 화병을 만들다! -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 매일』을 읽고....

 

1. 들어가며

 

  ‘(「서른 살」) (「견습생 마법사」)’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만든 시인 진은영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어떤 마법사로 살고 있을까? 하고 두 번째 작품인 『우리는 매일 매일』의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그곳에서 이미 그녀는 ‘견습생’의 표 딱지를 떼고 신비한 화병을 내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무딘 나의 감각을 살려내었고, 그녀의 화병에 담긴 시어들은 햇빛에 비춰 내리는 오색찬란한 유리 조각들 같았다. 마흔이 가까워진 그녀는 전보다 더 노련한 마법사가 되어 있었고, 자신만의 유리 화병을 만드는 앤솔러지를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엉터리

그의 갈라진 목소리 안에 또 다른 다섯이 살고 있어

저마다 녹색 침을 퉤퉤 뱉는

다섯 마리 새들을 키운다

새들은 깃털 수만큼의 이미지를 품고 있어

 

뽑힌 나무들 너머

덜덜거리는 굴착기 위에서

잿빛 깃털들이

여러 빛깔로

흔들리며

떨어지네

 

마지막 사람은 엉터리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한다

 

- 「앤솔러지」 부분

 

  본디 앤솔러지(Anthology)는 시나 소설 등의 문학작품을 하나로 모아놓은 것이다. 대개 주제나 시대 등 특정의 기준에 따른 여러 작가의 작품이 모아지는데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 매일』의 시 세계에서는 감각적 시어에 따라 그 작품의 주제가 드러나서 독자의 마음을 홀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이 시집에서는 진은영 시인이 작품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 화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노련한 마법사가 그것을 만드는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2. 동경(憧憬) 한 조각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작품을 모방하거나 동경한다. 나 또한 발제를 통해 진은영 시인을 알게 되면서,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었다. 나 또한 사람들의 숨어있는 감각을 깨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아직 ‘견습생 마법사’로 그녀를 동경한다. 우연을 가장해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에 서성이고 싶을 만큼, 내 가방 속에 ‘오늘도 매일 매일’ 들어 있는 그녀의 시집에 꼭 싸인을 받으며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어요?’라고 멘트를 준비할 만큼 그녀가 보고 싶다. 그런 그녀에게도 나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녀에게도 누군가를 동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최승자’이다.

  최승자는 대학원 수업에서 몇 번씩 등장했던 인물로 한국에서 시를 쓰는 모든 여성 시인이라면 적잖게 영향을 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우리는 매일 매일』 시집의 서언에 ‘우리들의 최승자’라고 쓸 만큼 진은영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시인들 사이의 일화인데, 쟁쟁한 원로 작가들과 신인 작가들이 함께 모인 술자리에서. 만취한 최승자 시인이 막 등단한 진은영을 부둥켜안으면서, 드디어 한국 시단에 자신의 계보를 이을 사람이 나타났다며 소리쳤다고 한다. 비평가들에게 이 신인은 어떤 사람을 닮았다 하는 것도 좋은 일인데 견습생 계급장을 직접 ‘최승자 시인’이 떼어줬다니! 그저 부럽기만 하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그녀가 최승자 시인을 동경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자.

 

‘최승자 선생님의 시를 원래 좋아하기도 했지만, 여성 시인이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쓰는 분이시잖아요? 시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에 대해서, 그리고 그럴 때 겪는 고통에 대해서요. 게다가 결혼도 안 하시고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분이시기도 하고요. '내가 나중에 시인이 된다면 저 시인 같은 고통과 기쁨을 겪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어요.’

 

  그녀는 이러한 생각 위에 최승자의 행보를 같이 한다. 최승자를 따라 혹은 그것을 앞서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최승자와 다른 점은 자신의 길을 먼저 가본 이에 대한 동경이 깊으나 최승자의 시어와 같이 과격하거나 죽음의 끝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지 않는다. 여기에 더 하여 니체의 애인이면서도 비관적이거나 결코 그녀의 시집이 회의적이지 않는 점을 바라볼 때, 그녀에게 있어서 동경 한 조각은 자신만의 문장을 가지는 중요한 원료가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2. 잿빛으로 빚은 우울의 발화

 

자신만의 반짝이는 화병을 만들기 위해 또 들어간 질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울 한 덩이다. 그녀는 물레 위에서 잿빛의 우울을 올려 화병의 형태를 빚어간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긴 손가락을 써가며 섬세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빛을 통해 또 다른 색채로 발화하고 있다. 잿빛 흙의 숨구멍으로 생동감 있는 시어들이 움직이면서 말이다.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는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 매일

 

- 「우리는 매일 매일」 전문

 

  색채의 마법사인 그녀는 그 잿빛의 우울 흙덩이 위에 서서히 그림을 그려간다. “버찌”의 붉은 빛이 “흰 셔츠”에 번져가는 심장의 핏물과 같이 강렬하다. 이러한 것을 통해 그녀는 “우리는 매일 매일” 우울이라는 것을 통해 기꺼이 넘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또한 우울을 대면할 때 두려움을 갖지 않아도 될 이유는 그것이 고통과 아픔의 주저앉음이 아니라 그 너머의 새로운 창작의 탄생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이렇듯 그녀의 시들은 고통스러움이나 절망보다는 겪어보지 못했던 경험들을 넘어서려고 하며 그러한 시도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 시에서는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익어 “토마토”가 “붉게” “흘러내리는” 듯한 노을의 빛, “네 조각”으로 “잘린” “오렌지” 같은 “사계절”의 빛 등이 “매일매일”을 충만하게 채운다. 이것은 시각적 감각을 통해 삶을 선명하게 감지하기도 하고 보이는 것 너머의 이면까지 탐색해 생의 감각을 빛으로 일깨우기도 한다. 이렇듯 우울을 넘어서기 위한 그녀만의 삶의 방식은 남들과는 다르게 말하는 것, 매일 매일 일상을 지배하는 상념들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잿빛의 우울을 한 덩이 한 덩이 모아 물레를 돌린다. 그리고 새롭게 발화하는 우울의 성지 즉, 그녀가 바라는 유토피아를 생각한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멜랑콜리아」 전문

 

  이 시를 보면 우울이라는 질료는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우울의 표현이 모순, 불열, 고통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안착할 수 있는 실체는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법사인 그녀가 신이 난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우울이라는 멜랑콜리는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라 부를 수 있다. 그녀의 시에서 우울의 색과 관련된 이미지는 혼합된 빛을 질료로 하여 새로운 세계를 완성한다. 그녀가 자신의 멜랑콜리아를 만드는 과정은 빛이 분출되고 흩어지며 우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것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일환이 된다. 우울의 회색과 혼합된 빛 이미지는 이처럼 낯선 빛깔과 뒤섞이거나 흐르고 증발하는 유동성을 통해 정체성을 구현하려는 새로운 욕망의 빛깔로 드러나고 있다.

 

3. 사랑이라는 투명한 유약

 

  잿빛 색으로 빚은 우울 한 덩이가 참 예쁘게 빚어졌다. 마법사는 서둘러 먼지 낀 창고에서 무엇인가를 뒤져 내 앞에 내어 놓는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유약이었다. 이렇듯 진은영 시에서 사랑의 이미지들은 투명하거나 투명에 가깝거나 투명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존재한다. 그 빛은 비워져 있는 공간으로, 틈으로 빛이 확산되어 빨아들이는 여타의 빛과 공간으로 제시된다. 또한 이와 더불어 빛의 질료들의 추이를 추적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미지들이 발단하는 장소로서의 투명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여름

낡은 장미무늬 카펫 위로 걸어가

하얀 먼지를 털면서

방망이로 비의 투명한 심장을 두드리며

 

돌멩이는

녹색으로

죽음은

막대사탕으로

노래는 치즈에 뚫린 구멍들로

(묘사하면서)

 

너의 늘어나는 다리를 부드러운 달의 접시에

꽂아라

새로운 기호의 쥐들이 달려오도록

 

- 「미친 사랑의 노래」 전문

 

  진은영의 시편들 중에서 「미친 사랑의 노래」는 투명함으로 넘치는 빛의 흐름 속에서 역동감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카펫의 무늬로 납작하게 눌려 있는 “여름”의 “비 오는” “장미” 밭의 장면에서 시작된다. “방망이로 비의 투명한 심장을 두드리며”라는 표현은 투명한 빛에 대한 상상력을 드러낸다. 카펫 위의 장미와 심장의 붉은 빛은 겹쳐진다. 카펫을 방망이로 두드릴 때 튀어 오르는 핏물을 투명함의 분출로 드러낸다. 붉은 빛이 투명함으로 전이되는 까닭은 카펫을 수식하는 “낡은” 붉은빛과 연관되는 방망이로 먼지를 털 듯 카펫의 빛을 털어내기 때문이다. 낡은 카펫에 쌓인 먼지를 두드리듯 이미 과거의 환영이 되어버린 붉고 뜨거운 심장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심장의 빛, 장미의 빛은 물이 빠져서 사랑은 투명으로 남는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유약을 발라 자신의 화병을 유리와 같이 맑고 투명하게 만들어 간다. 그 사랑은 진한 색의 사랑보다 맑아지는 편을 택하여 더 높은 차원의 지점에 도달되기를 원하고 있다.

 

4. ‘불꽃’으로 담금질하는 실패들

 

  유약(釉藥)을 바른 작품이라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의 유약(幼弱)함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단단하게 담금질할 불꽃들이 필요하다. 그녀의 시어들은 실패라는 불꽃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더욱 완성도를 높여간다. 간간히 심겨져 있는 철학적 사유들은 삶을 어떻게 직면하면서 자신만의 화병을 만들어 가야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그녀는 언제든 자신의 화병을 깨뜨리고 그것이 실패작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새로이 다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하얀 소녀의 가슴처럼 머뭇거리며

조금씩 볼록해지는 의문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슬프고 흐릿한 오후들이여 안녕

금관악기들의 아름다운 구멍들이여 안녕

닫힌 책의 검은 표지들이여 안녕

 

뜨거운 빵의 흠집 없는 표면들이여 안녕

갈라지는 틈에서 태어나는 감각들

모닥불 위에 놓인 거북의 껍질처럼

 

딱딱한 책을 태워라

무엇인가 점쳐라

우연을 사랑하라

 

(중략)

 

마지막 시를 달라

이 사물은 미학적으로 낡았지만 마음을 이동시킨다

저곳에서 이곳으로

 

흔들리는 물그릇같이 젖는 시인

늘 페허로 돌아오는 사람

부서진 벽 너머 길게 펼쳐진 하늘 깃털을 좋아하는 사람

파란깃털들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쟈스민 지뢰, 들장미넝쿨의 낡은 탱크 위에

여자와 아이들의 구멍난 얼굴 위에

 

실패한 시인

실패한 혁명

불꽃

분홍 플라스틱의 고약한 연기 속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물속의 불꽃들

 

*samuel Beckett, Nobow on(1989).

 

-「나에게」 부분

 

  서두에 기재된 것처럼 나는 견습생 마법사라 주눅이 한창 들었었는데 그녀는 선임 마법사로서 다정하게도 나의 실패를 더 잘 실패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그것은 진은영의 다음 인터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는 필연적으로 실패일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죠. 통념적인 언어 사용법을 따라가면서 글을 쓰면 성공률이 높죠. 그런 의미에서, 시라는 것은 실패를 심하게 하면 할수록 좋은 시일 확률이 높아요.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의 영역 구분이 항상 존재하는데 이 구분 자체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문학이기도 해요. 어떤 새로운 것을 '문학'이라는 범주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학을 넘어서야 하지요. 이렇게 넘어서는 일은 처음 하는 낯선 행동이기 때문에 기성의 기준에서 보면 항상 실패로 '보이는' 결과들을 동반해요. 그러니까 그 결과들에 대한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자꾸 실패해야 하고 잘 실패해야 합니다.

 

  또한 시 「나에게」는 쪼개진 틈 사이로 분출하는 빛의 이미지를 불꽃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우울의 흙 한덩이와 투명한 사랑의 유약 속에서도 갈라지는 “빵과” 같은 “표면들”과 같이 생기는 “흠집”들을 닫게 한다. 완고한 사상들로 관철된 “책”과 “딱딱한” 껍질들 또한 그렇다.

  책을 보아 알 수 있는 “혁명”도 “시”와 삶도 무수한 실패의 영역들 속에 있을 뿐이다. 씁쓸한 실패와 틈이 벌어진 감정들은 불에 녹아내리는 “고약한 플라스틱 냄새”의 찜찜함처럼 신념으로 가득 찼던 일들에 의혹을 품게 하여 우리를 연약하게 하지만, 용기를 내여 나의 실패들을 불꽃 가마니 속에 ‘가만히’ 담금질 해 보는 것은 인생이라는 작품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 그녀는 더 나아가 “물속” 가득 불을 피우려 계속해서 불꽃을 만드는 무모하지만 단념하지 않는 치열함의 가능성 또한 열어 보이고 있다.

 

5. 반짝이는 유리 화병이 놓일 자리

 

  그렇다면 이제 다 만들어진 유리 화병을 ‘어디로 놓아야 할까?’, ‘어디에 놓아야 반짝 반짝 빛이 날까?’ 이것은 문학의 유용성에 관한 질문이다. 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곳에 입학할 때 그보다 좀 더 다른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진은영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녀의 시는 매번 자신의 유리 화병을 ‘정의의 붉은 광장’을 향하여 두고 있었다. 그녀의 시가 여타 다른 시인들과 차별된 점을 가진 것은 이것이다. 문학과 정치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나아가야 할 시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마법사는 사람 마음뿐만 아니라 세상까지 움직이려 하고 있다.

 

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이제 바람도 멈추었다네

우리의 녹색 비밀을 묶어둔 노끈들

처음으로 숫자를 적은 작은 공책은 어디로

 

물에 빠진 고양이털 하얗게 얼어가는 추위

 

나무 실로폰은

먼 마을의 저녁 종소리는

어디로

 

낡은 선반 위에서는

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로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이주노동자 10명 사망, 17명 부상

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

보호 외국인의 도주를 우려해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쇠창살 문 개방 지연, 감금된 채

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

노동자들 연기에 질식 사망

 

사탕에 그려진 달콤한 회오리를 따라 혀를 내밀었는데

어린 우리는 높은 담장을 넘어

이웃의 마당에 빗방울로 떨어졌는데

과일나무 가지들은 빨간 열매 달고

우리를 계속 따라오는데

 

서리 낀 창유리로 물방울

맑은 얼룩의 길을 내며 흘러내린다

연기에 그을린 고양이털

지폐처럼 빳빳하게 얼어가는 추위

 

우리가 모아놓은 잿빛 구름이

밀빵처럼 부풀어오른다

갇힌 사람들의 피로 젖은 빵을 뜯으며

저녁은 몹시 어두워지는데, 이제 어디로?

 

- 「Quo Vadis?」 전문

 

  2007년 2월 11일 전라남도 여수시 입국관리소의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0명이 숨지고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불길에 휩싸인 외국인들의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도주가 우려되어 쇠창살로 만든 이중 잠금장치를 개방하는 것을 지연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9명의 외국인이 유독가스와 연기에 질식해 숨졌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큰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현장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있지 않았으며 화재경보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곳은 보호소가 아닌 구금시설이나 다름없었다. 외국인 보호시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진은영은 이러한 소외된 타자들을 쉽사리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타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타자를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배제하고 있을까. 타자는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출현은 ‘우리’들에게 큰 뉴스거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타자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우리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이 시로 하여금 타자화 되어버린 외국인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리고 있는 모든 타자들을 다시 사회 속으로 이끌고 출현시켜 문학의 유용성을 실현시키고 있으며, 항상 “Quo Vadis?” 라는 질문으로서 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는 “우리”의 폭력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화재 사건과 관련해 외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모습을 “우리의 녹색 비밀을 묶어둔 노끈들”이라는 사물로 형상화 시켰으며, 화재로 전부 타버린 보호소의 재들을 “우리가 모아”두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시를 곱씹을 때마다, “갇힌 사람들의 피로 젖은 빵을 뜯”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그녀로 하여금 발견하게 되며, 그녀는 그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여전히 ‘긴 손가락’을 들며 “이제 어디로?”라고 질문하고 있다.

 

6. 나가며

 

  누군가가 나에게 ‘진은영의 시가 왜 좋으냐?’ 물으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우울한데 그게 참 예뻐”라고 말이다. 그녀는 니체의 애인이면서도 자신의 삶에 우울이 와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시의 질료로 사용하여 그것에 대한 비관과 허무주의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 강렬하면 금방 질려버리는 사랑의 색채를 투명에 가까운 것으로 표현하여 그 어떤 사람과 상황에도 반짝이는 포용력을 가지며, 이것은 철학적 사유로 삶의 실패들을 담금질하여 더 견고히 이르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는 자신이 가진 유리 화병에 감탄만 하고 있는 독자들을 반성케 하며, 이제 당신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그 화병을 만들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선임 마법사의 집요한 질문에 나는 이제 대답해야 하겠다. 어떠한 방향성으로 그 화병을 만들지에 대해서 말이다. 시인 최승자를 동경하며 그 계보를 이을만한 ‘물건’을 만들어낸 진은영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다짐을 해야 할까?

  이건 선임이 옆에 없어서 하는 뒷담화인데,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만 신봉하지 않는 이유가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들고 있는 유리 화병이 어떨 땐, 너무 여성스럽게 보인다는 점이다.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을 나는 빛에 ‘의존’하는 시어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지 않은 여리 여리한 시어들을 바라볼 때, 조금은 안타까운 면이 없지 않다. 소위 여성적 글쓰기라는 것이 이러한 이미지들로만 상기되어야 할까? 나는 선임 마법사로부터 이를 극복하고 싶다. 그래서 어느 자리에 그녀를 우연히 마주했을 때, 그녀의 동경인 최승자가 그녀를 반긴 것처럼 최대한의 환대를 받고 싶다. 누가 그러더라. 꿈은 크게 가지라고.

 

 

사랑이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