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집 / 유치환
기척 없이 짙어오는 푸른 저녁의 푸른 어둠이 옷자락에 묻는 호젓한
골목길, 이따금 지나치는 이도 없는 그 돌다리목 한 오막사리 문전에
상중이라 등 하나 내걸려 밝혀있고 상제도 곡성도 문상도 없는 가엾은
초상집
늙은 홀어미에 소박더기 딸, 그리고 그의 철부지 딸, 셋이 서로 쳐다만
보고 불꺼진 듯이 살다 그 젊은 소박더기가 그만 죽은 것이다.
아까사 언짢아하는 한 이웃 영감이 등 하나 들고와 문전에 밝혀주고
가고, 단간방 한 옆으로 아무렇게나 눕혀둔 그 지지리도 못났던 목숨의
숨 끊어진 딸년을 두고, 그 또한 딸년 못잖은 기박으로 오직 쇠꼬치같이
모질음만으로 살아온 늙은 어미는 이내 몹쓸년! 몹쓸년을 뇌이고 있고,
이미 뱃속에서부터 생겨선 안 될 것이 생겨서 어느 뉘게서도 한번이고
따뜻이 안겨본 적이 없는 천덕이 손주년은 한 구석에 푸새처럼 꾸겨져
소리없이 흑흑거리기만 한다.
이밤은-어느 세상과도 무관한 이 밤은 적적히 제대로 깊어가기만
마련인데 때않이 등 하나 호젓이 밝혀진 이 골목길 오막사리 문전에는
우러러 보아도 보아도 칠흑같은 하늘에 바눌귀 같은 별 하나 안 보인다.
-
초상난 날은 누군가의 부재를 슬퍼하는 날이다.
하지만 늙은 홀어머니에 소박더기가 살았던 이 집은 어느 세상과도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차가운 세상은 이들을 돌봐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초상날은 이 날 뿐만이 아니였으리라.
이들에게는 일상처럼 부재의 목록이 존재했다.
부재의 목록에 속하지 않은 것은 오직 '서로'였다.
소박더기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손주년이었는데
그 마저도 죽어 버리니 바늘귀 같은 별 하나도 보이지 않아
너무 마음이 아픈 시다.
이 시에서 시인이 감지하고 있는 부재의 목록은 어떤 것이 있을까?
1. 기척 없는 호젓한 골목길
- 이 동네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드문 곳이다.
가로등도 내려오는 빛도 없어 밤에는 옷자락이 검푸르다.
2. 젊은 소박더기
- 그마나 있는 것은 철부지 딸 셋과 늙은 홀어머니였는데,
서로를 껴았았을 때는 슬픔이 그래도 괜찮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완전히 불은 꺼지지 안았는데, 불씨가 남았어도 불 꺼진 듯 살았는데
그 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3. 아까사 언찮아하는 한 이웃 영감
- 이웃 영감은 부재의 목록을 채워주기 위해 등 하나를 세운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데 이 영감만 이 오두막집에 들러 등 하나를 밝혀 주고 간다.
순간 순간 인생을 쌓아 살면서 타인에게 이 영감의 무심하지만 따뜻한 마음같은 것을 내어 준 적은 언제일까?
혹시 우리는 상대를 헤아려보는 마음들이 '부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웃 영감을 통한 행동이 역설적인 의미로서 우리의 부재의 목록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4. 늙은 어미
- 늙은 어미는 딸년에게 줄 것이 기박한 인생 밖에 없었다.
쇠꼬치같이 모질게 가늘고 길고 차가운 것이 어미의 인생이었다.
그 모질음이 쇠꼬치 같을지라도 넉넉한 집이면 고기라도 먹을 것이라도 달아 주어서
딸의 마지막 밥상에 올려 놓을 법 한데
그것이 없어 어미는 몹쓸년 몹쓸년한다.
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기박한 운명을 물려준 자신의 인생을 탓하는 것이리라.
5. 천덕이 손주년
- 기박한 운명은 딸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뱃속에서 생겨서는 안될 천덕이 손주년에게까지 이어진다.
돌아보면 늙은 어미에게도죽은 딸에게도 서방은 없었다.
이들은 푸새라도 얻어 먹일 요량으로 으스러지게 일을 했으리라.
그래서 남아 있는 손주년은 누구에게도 안겨보지 못하고
그 동안 마주한 것이 엄마 품이 아닌 숨죽은 푸새였으리라.
그리고 그 손주년은 푸새처럼, 들풀처럼 홀로 외로이 자랐을 것이다.
우러러 보아도 보아도
칠흑같은 하늘에 바눌귀 같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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