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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by noobim 2022. 10. 4.

깨어보니 검은 나팔꽃 안 이었다

축축하고 좁은 틈에서
이리 저리 불룩 불룩거리며 작은 물방울로

물방울이 점점 여러 갈래의 가지를 낼 동안

꽃은
때때로 물컹거리는 과육에
자신의 발이 푹푹 빠지는 꿈을 꾸고
가지 위에는 무엇인가를 움켜진 구렁이가 있었다고

엄마가
후루츠 통조림을 뜯을 때 하는 되풀이

- 첫 아이가 나올 때 와르르 복숭아 향이 났다니까요

배가 불룩 불룩거려서 아들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아들 같은 딸이에요 어릴 때 서서 오줌 누는 시늉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아줌마는 이름이 뭐예요? 우리 딸하고 많이 닮았네

매일 밤 같은 노래를 부르는 엄마를 재워놓고
집에 돌아오는 길 기울어진 운동장 벤치에서

유년 시절 내내 홀로 있던 한 아이가
도무지 치마는 입기 싫고 짧은 머리에 공놀이만 좋아하는 아이가

가만히 내 옆에 앉아 내어 놓는 기억 한 조각

- 저 실은 엄마 뱃속에 깜빡 놓고 온 게 있던 거래요.


** 시작 노트

나는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복숭아가 나오는 꿈이면 잠에서 깨는 연습을 했다고 했다.
모든 집안 식구들이 엄마 배를 보고 배가 불룩 불룩 거리고 뱃속에서부터 아이가 이리 저리 뛰 놀았기에 분명 아들인 줄 알고 기뻐했다고 했다. 그런데 있어야 할 것이 없었던 나는 늙은 호박 두 덩이를 낑낑 대로 메고 온 할머니를 실망시키며 시골로 다시 돌려보냈고 엄마는 한 여름,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벗겨 누이고 혼자서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성격은 고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런 탓이었는지 어려서부터 나는 짧은 머리에 핸드볼과 농구를 좋아하고 치마는 별로 입기 싫었다. 그런데 이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금 억울해 졌다.

아들 같은 딸로 커나갔기에 부딪히는 벽이 너무나도 많았다. -물론 이 벽이 나중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별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화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벽에 부딪힐 때마다 내가 남자였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혹시 내가 엄마의 뱃속에서 무엇인가를 두고 와서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를 상상했다.

우연일지 필연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뒤에 들어선 동생은 남자아이였다고 한다. 뱃속에서 8개월인가를 살다 갔다고 엄마는 이제야 이야기를 해주셨다. 퇴고를 하다가 이야기를 넣지는 않았지만, 내가 두고 온 것을 그 친구가 가지고 가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그 외 몇몇의 사건들은 시적 상상들이다. 엄마의 기억력은 말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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