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편지의 효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글은 말보다 더 힘이 좋다. 이는 강하거나 세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유용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친구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그중 흥미로운 주제가 있었다.
어떤 소설에서 본 내용이라면서, 주인공이 사랑했던 사람이 죽고 그 상대를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머리카락부터 몸을 천천히 먹어나간다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 소설 '향수'도 그러한 쪽이다. - 조금은 섬뜩하지 않은가? 라고도 생각했지만 정작 그 글을 읽을 때는 그것이 이해가 갔었다는 말과 함께 내가 건넨 편지도 그렇게 잘 먹어나가며 기억하겠다고 답장을 주었다.
나는 편지를 쓸 때, 그 사람의 답장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하였고, '전송' 버튼을 클릭하였을 때는 내 손을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그 후에 일과 감정은 상대의 소유라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데 이런 멋진 답을 주어서 '상대를 사랑하면 먹어버리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이 친구의 물음처럼 '이것이 조금은 섬뜩한 문장이지 않은가?' 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나는 조금은 어색한 물음을야금 야금 먹으며 그것과 친해지게 되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비유라는 것이다. 소설 가운데 어떤 픽션이 있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상대를 먹어버리는 일, 그 후에 오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소화되어 내 본체가 내가 아닌 상대방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인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사랑을 하면 내가 남는가 네가 남는가' 라는 질문에 이기적인 나는 내가 남는다는 어설픈 답을 내어 놓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사랑은 나의 크기를 넘어 '너'를 남기게 되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사랑이 끝난 후에도 '너'는 죽어 없어지지 않고 내 안에 살아 있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 한강은 죽어버린 역사의 인물들을 사랑하여 작가의 작품 안에 살아 있게 했다. 그게 고통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야금야금 먹어 버리고 어떠한 흔적처럼 살을 만들어 놓았다. 개인적으로 한강의 작품들을 읽을 때 흰 벽처럼 그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곤 하는데 글을 쓰는 이는 더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사람들과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먹고 자신 안에 그들이 살아있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는 것이 나에게 큰 배울 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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