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79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지연언니에게 문득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밤입니다 마침 언니가 출판사를 걱정하는 말에 '느리더라도 바른 길을 천천히 그리고 한 사람을 위한 밤이 쌓이면 된다'라고 톡을 건낸 밤이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자기 일을 선뜻 맡긴다는 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닌데 그것도 학부 때 만났던 언니가 그게 20년 전인데 멀 믿고 이리해 주시는지 참 감사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언니를 통해 그게 무엇인지 쌓여가는 밤이 되었네요. 토닥이기 위해 '모두 다 잘 될거예요'라고 맺고 싶지만, 이건 조금 무책임해 보일까봐 좋은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 조만간, 밥 먹어요 우리. 2021. 8. 28. 일기1 큰 파도를 가두기에 효엄이 있는 것은 일기장 만한 것이 없다. 나는 그 파도가 방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도정하는 펜을 들고 서툰 미장이가 된다. 그래서인지 그런 날이면 밤잠이 없어진다. 아무리 완벽하려해도 허공이 보이니까. 얼마 전의 일이다. 원치 않는 판도라 상자가 열어져 적잖이 당황했던 것 같다. 그 상자의 주인공은 내가 분명 아는 사람인데 낯선 이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더 이상 다가오지말라고 한참이나 나를 응시했고, 그 밤은 가위에 눌려 잠에 들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내 힘으로 상자가 닫아지지 않는 것을 새삼 발견하고 한 없는 슬픔이 몰려왔는데 실망보다 상자의 주인공이 한편으로 이해가 되고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잠시 마음이 부산했지만, 이러한 사실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희망을 .. 2021. 8. 21.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뜻 없는 단어들이 만드는 또 다른 세계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시평 나에게 있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사냥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하지만 이제니의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시집에서는 의미를 찾아 나서는 고지식한 독자의 사냥을 가로막고 서서 큰 낭패를 맛보게 한다. 처음에 이 시집을 그렇게 읽었다가 큰 수렁을 만났다. ‘이게 왜 어째서 시일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 그리고 낱말과 낱말 사이 뜻 없는 것들이 의미보다 퍼져나가는 어떠한 ‘세계’을 만들고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세계는 정형화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시인만이 단어들로 인해 힘이 생기고 표면장력처럼 무한대의 내면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2021. 8. 13.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 쓸쓸한 이방인의 노래 -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1. 들어가며 허수경의 시집을 받아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 ‘날씨가 이리 좋을 게 뭐람?’ 하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시집을 읽으며 시인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맞닿았을 때는 내 머리에만 먹구름이 생기고 어디선가 비를 맞고 서 있는 (「늙은 가수」)가 표정을 빠뜨린 채(「표정 1」)을 나타냈다. 또한 그녀는 ‘아아 오오 우우’(「저 나비」)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문체의 노래를 이어 가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의 노래가 자신의 불우(「불우한 악기」)를 다하며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어떠한 근원적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시편의 내용과 겉표지 색이 너무나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녀는 나를 자신의 노.. 2021. 8. 13. 쿠킹 클래스 아기 궁둥이 같은 빵을 바라보며 읍내 빵집으로 시집가고 싶었던 엄마는 과묵한 전기공 사내와 쪼글거리며 사십년 째 숙성되어 가고 있기에 부탁이 있단다 그러니까 딸아! 다음 쿠킹 클래스에는 흰 뼛가루 같은 이스트를 저 동산 위에 뿌려주겠니? 딸은 아빠를 닮았으므로 대답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엄마는 아가를 잃어버리지 않게 포대기로 꽁꽁 묶어 다녔다던데 이번 클래스에서는 그 동안의 마음처럼 소리도 없이 까맣게 빵을 태운다. 2021. 8. 13. 나란히 거실에 화분 놓을 자리를 찾습니다 진열대의 받침이 보이지 않아 창가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새들이 앉아야 할 전깃줄에 화분이 걸쳐 있으므로 안과 밖의 풍경이 어색하게 어울립니다 이게 맞습니까? 집배원 아저씨는 매번 이름을 궁금해 하고 ‘희’가 아니라 ‘히’입니다 나를 알면서도 잘 모르는 이의 편지들을 받아들고서 화분에는 이렇게 적습니다 - 부사(副司)로 살고, 선(線)은 없습니다. 2021. 8. 13. 이전 1 ··· 4 5 6 7 8 9 10 ··· 14 다음